‘우리말은 어떻게 생겨났고, 지금껏 무슨 일을 겪어온 것일까?’
윤구병(73·사진) 보리출판사 대표가 최근 펴낸 <내 생애 첫 우리말>(천년의상상)에 달린 부제다.
자신의 출판사에서 20억원을 들여 우리말사전(<보리국어사전>)을 펴냈을 정도로 윤 대표의 우리말 사랑은 남달랐지만, 이 주제로 책을 쓰기는 처음이다. 지난 4월부터 출판사 실무에서 손을 떼고 전북 부안군 변산공동체 마을에서 머물고 있는 윤 대표를 지난 8일 전화로 만났다. 지난해 초 간암 판정을 받았으나 “지금 나아지고 있다. (사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는 활기찬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강성만 선임기자
“우리글이 없던 시절 한자를 빌려 쓰다 보니 오해 살 만한 일이 생깁니다. 우리말을 잘 살피면 고대 역사를 되짚어 볼 게 많아요.” 우리말 공부가 역사나 신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가닿았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책엔 논란이 될 만한 주장이 제법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여자였다는 추론이 대표적이다. ‘박은 ‘불이 밝다’ 할 때처럼 환히 빛나는 해를 가리키고, 그 뒤의 붉을 혁(赫)은 박이라는 말을 풀어주는 구실을 한다. 거세는 여자인 가시버시의 가시여서 박혁거세는 박가시, 박각시라고 할 수 있다.’ 해의 각시이니 여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풀이다.
그는 우리 신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호랑’이는 ‘호랑’(虎狼)이라는 한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의 신화이니 ‘범’이 맞다고 주장한다. 중세 기록에는 범을 ‘밤’으로 쓰기도 했다면서 어두운 밤이 범으로 의인화된 것으로 보면 해석의 여지가 늘어난다고 했다. 호랑이로 보면 잔혹함만 두드러지지만, 밤으로 보면 빛의 탄생을 다룬 신화의 속뜻에 더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주장은 기존 신화(해석)에 대한 정면도전입니다. 박혁거세가 여왕이었다면 박씨 문중에서 ‘왜 모독하느냐’는 말이 나올 수 있겠죠.”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자료가 있느냐는 물음에도 자신있게 답했다. “백제나 고구려 말을 꽤 오래 공부했어요. 우리보다 어떤 부분에선 앞선 북한의 연구 성과도 고루 살폈죠.”
윤 대표는 철학 전공자다. 충북대에서 철학 교수도 했다. 우리말에 빠져든 계기가 궁금했다. “이오덕 선생이 77년과 78년 펴낸 <이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일하는 아이들>을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아이들이 할 말이 이렇게 많은데, 어른들이 아이들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고 어려운 말을 쓰면서 살길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했죠. 나도 모르게 어려운 말을 쓰고 있었어요.”
그가 전공한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도 “서로가 하는 말을 잘 알아먹을 수 있는 게 참세상”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했다. “존재론이 다루는 것은 결국 ‘이다, 아니다’ ‘있다, 없다’의 문제입니다. 이 말로 모든 생각을 얽어가고 느낌을 드러냅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게 참이니까요.” 영어 단어 ‘비’(be)는 ‘이다와 있다’ 두 가지 뜻이 있어 의미 파악이 쉽지 않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다, 있다’의 의미를 잘 알아먹는다고 했다. 우리말로 쉽게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데, 왜 어려운 말을 쓰느냐는 항변이다.
그는 또 느낌과 감각이 살아 있는 우리말이 사라지면 소통이 공허해지고 그 결과 말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토박이말은 소통·평화·창의력·행복·즐거움과 한 묶음이라는 얘기다. ‘감은돌이’라는 우리말 지명을 보기로 들었다. 이 말은 강쪽으로 불쑥 내민 벼랑바위를 감아 도는 강물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검은 돌을 뜻하는 흑석이나 현석동으로 바꿔놓으면 우리말의 고유한 상상력이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너나없이 마음놓고 입을 놀릴 수 있어야 우리말이 늘고, 그래야 우리말이 갈래를 칠 수 있어. 욕도 하고 우스갯소리도 하고 해. 그래야 말이 살아나고, 사는 게 신이 나. 말을 주고받으면서 즐거워야 하잖아. 그래야 행복하지.’
그가 보기에 한자나 영어를 빌린 개념어를 쓰는 것은 “힘센 나라에 기대어 살길을 찾자는 생각”이다. “(이렇게 해서) 살길을 찾는 사람은 힘센 사람뿐입니다. 힘없는 사람이 서로 도와서 살길을 찾아야지요. 그러려면 서로 주고받는 말을 알아먹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윤 대표는 <한겨레> 칼럼 등을 통해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6·25전쟁으로 집이 풍비박산 났어요. 제 형님 여섯이 전쟁 시작 한두 달 사이에 남과 북 군대에 끌려가 죽었어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뼛속 깊이 박혀 있지요.” 그는 미국의 남한 내 사드 배치는 “전쟁광들이 벌인 일”이라며 “전쟁광들과 끝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휴전선 아래 평화마을을 공약했지요. 이를 지켜 남과 북 젊은이들이 오손도손 모여 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언제라도 대통령을 지지할 겁니다.”
그는 도법 스님과 함께 쓴 <스님과 철학자>란 책도 곧 펴낸다. 조계사에서 함께 해온 불교 언어를 한글로 바꾸는 모임(불한당)의 결과물이다. <꿈꾸는 형이상학> 출간도 준비 중이다. “생명의 근원은 어디에서 왔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여기서 인간의 몫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 대표는 세상이 삶이 아니라 죽음을 향하고 있다면서 세월호 참사를 거론했다. “힘있는 사람들이 학생들을 죽인 것입니다. 차라리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살아남았어요. 학교뿐 아니라 종교적 설교 등을 통해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sungman@hani.co.kr, 사진 천년의상상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