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시와 헤이룽장성 정부는 하얼빈이 동아시아 맥주의 본향임을 내세우는 성대한 맥주축제를 매년 6월 연다. 사진은 2012년 하얼빈 맥주축제. <한겨레> 자료사진
맥주, 전세계에서 연간 2억㎘ 가까이 소비되는 가장 대중적인 술. 기원전 4000년쯤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들이 처음 담가 먹기 시작했다는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이 발효주는,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적이 없다. 동아시아에서 맥주의 역사는 ‘이식’으로 시작됐다.
1900년 만주 하얼빈에 동아시아 최초의 맥주공장이 들어선 이래 21세기 세계 최대의 맥주 시장으로 떠오르기까지 한 세기 남짓한 역사를 식민주의, 내셔널리즘, 국제화라는 세 키워드로 흥미롭게 풀어낸 짤막한 논문이 나왔다.
<만주 모던> 등 일련의 저작들을 통해 만주와 동아시아의 근대를 천착해온 한석정(63)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는 계간 <사회와 역사>(한국사회사학회) 최근호에 기고한 소논문 ‘식민, 저항 그리고 국제화’에서 “20세기 동아시아 맥주의 확산에 관한 연구”를 펼쳐 보이고 있다.
“서구에서 맥주의 확산은 도시화, 자본주의, 철도 발달과 궤를 같이하지만”, 동아시아에서 맥주는 ‘식민자의 술’로 도입됐다. 하얼빈에 연산 1200톤 규모의 맥주공장을 세운 것은 산둥성을 점령한 러시아인들이었다. 3년 뒤 ‘의화단 사건’을 기화로 독일 군인들이 진주했던 중국 칭다오에는 독일·영국 합작으로 맥주공장이 들어선다. 중국 대표 맥주인 칭다오 맥주의 시작이다.
일본은 서구의 방식을 답습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다이닛폰’ 맥주가 칭다오 맥주를 인수해 “중국 시장의 교두보로 삼았다.” 식민지에 새 기업과 원료 농장을 세우고, 토착기업들을 강제 인수하면서 맥주 시장을 장악해나갔다. 일본의 양대 맥주기업 다이닛폰과 기린은 국내 시장을 7 대 3, 해외 시장을 8 대 2로 나눠 가졌다. 식민지 조선에 다이닛폰은 조선맥주(하이트맥주의 시원)를, 기린은 쇼와기린(오비맥주의 시원)을 만들어 “해방 후 한국 맥주산업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일본 맥주기업들은 필리핀 등 동남아 식민지에도 진출했다. “제국주의는 일본 맥주의 해외 진출에 기폭제가 되었고, 맥주는 정부의 주된 세원”이었다. 일본 맥주업계는 패전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지만, 점령군 미군의 수요와 ‘한국전 특수’ 덕에 되살아난다.
씨앗은 식민자들이 뿌렸지만, 전후에 이를 키운 건 현지 정부들이다. 대만 다카사고 맥주는 정부 전매회사로 성장해 21세기 초 공영화됐지만 여전히 국내 1위다. 베트남의 사이공, 하노이 맥주도 전후 정부에 인수됐다. 1930년대 ‘국화(國貨) 운동’(국산품 애용 캠페인) 당시 외면받던 칭다오 맥주는 전후 국민당 정부를 거쳐 공산당 정부가 인수한 뒤 1960년대부터 외화 획득에 큰 역할을 했다. 개혁·개방 뒤엔 파격적인 지원 아래 거대 맥주회사로 키워졌다. 베이징 옌징(燕京), 광저우 주장(珠江) 맥주도 같은 경로를 밟았다.
이제 맥주의 식민주의적 기원은 더 이상 치부가 아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맥주는 식민주의적 기원까지를 상품화한다.” 칭다오는 옥토버페스트를 흉내 낸 맥주축제를 해마다 열고 ‘독일 기원’ 이미지를 광고한다. 세계적 추세에 맞춰 독한 포터(porter) 대신 순한 라거(lager)로 갈아탔고, 생산량의 70%를 수출한다. 싱가포르 타이거 맥주는 “네덜란드 맥주 400년의 기술 축적”과 같이 유럽과의 연계를 앞세운 적극적 마케팅으로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맥주로 성장했다.
1900년대 초반 처음 맥주를 마셔본 중국인들은 ‘말 오줌 맛’과 비슷하다고 했다. 60년대 중국의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은 반병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산과 소비에서 세계 1위다. 일본은 지난 한 세기 동안 150여개 회사가 명멸하며 경쟁한 결과 세계 7위 생산·소비국이 됐다. 세계 10대 맥주기업 중 비서구 기업으로 이름을 올린 3곳, 중국의 칭다오와 쉐화(雪花), 일본 아사히가 모두 동아시아의 맥주다.
식민의 역사는 대개 흑역사로 치부되지만, 모든 면에서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토착의 제압으로 출발한 동아시아 맥주사가 그런 ‘예외’의 하나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동아시아 나라들에 “기회를 초래한 세계”이기도 했다. 특히 미각의 세계는 단순히 권력이나 경제적 토대로 환원해 설명하기 어려운 상대적 자율성이 있다. “일방적인 서구발 확산이 아니라 대응과 혁신이라는 이 미각의 역사를 통해 볼 때 현재 진행되는 미각의 세계화에 대한 전망을 꼭 어둡게만 볼 수는 없다”고 한 교수는 말했다.
강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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