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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쪽빛 미스터리’ 품고 떠난 동아시아 10년 대장정

등록 2016-08-04 19:14수정 2016-08-04 19:29

쪽빛으로 난 길 - 동아시아 쪽빛을 찾아 떠난 예술 기행
신상웅 지음/마음산책·1만5000원

쪽빛을 편애하는 남자가 있다. 미대생 시절부터 벌교 염색 공방을 드나들었고, 20대 끝무렵엔 아예 귀향했다. 충북 괴산 땅에서 쪽을 길러 천을 물들였다. 겨울이 되면 멀리 떠났으며, “늦지 않게” 돌아오는 일을 반복했다.

<쪽빛으로 난 길>은 염색가 신상웅(48)이 동아시아의 푸른빛을 찾아 다닌 여행기. ‘블루로드’라고 할 만하다. 갈피마다 풍기는 문학적 ‘아우라’와 사진 속 푸른빛에, 책을 쥔 손끝부터 파란 물 든다. 그의 쪽빛 기행은 2006년부터 10년 동안 이어졌다. 중국, 타이, 베트남, 라오스, 일본을 두루 돌며 만난 염색 공방, 장인, 부족의 삶과 문화를 만났다.

‘화포’(花布) 때문이었다. 푸른 쪽 염색을 하면서도 “내 것이란 확신이 들지 않았”던 어느날, 맥이 탁 풀렸다. “과연 나는 어디쯤에서 저 푸른색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을까.” 정체성에 대한 갑갑증이었다. 우연히 연암 박지원의 편지글을 읽다가 ‘화포’라는 것을 처음 만났고, 곧 그 실체도 확인할 수 있었다. 화포는 천에 물들일 부분과 물들이지 않을 부분을 의도적으로 나눠 무늬를 내는 일. 지은이는 “천 위에 누군가 의견을 남기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나도 푸른 천 위에 내 의견을 남기고 싶었다.” 홀로 ‘푸른 길’을 내는 것도 한 땀 한 땀이었다. 지도도 정보도 없었기에 저인망이 바닷속 훑듯 갈 곳을 얻었다. ‘쪽빛 길잡이’는 곳곳에서 나타났다. 서점 구석에서 엽서를 쓰다가 문득 <몽족의 바틱>이라는 책을 발견했고, 명품이 즐비한 방콕 쇼핑몰에서 난데없이 화포를 보고 말았다. 무작정 간 일본 여행에서는 기적처럼 ‘시보리’(화포) 대가 다케다 고조의 유작전을 만났다.

중국 구이저우성에서 먀오족은 쪽빛을 가리켜 “보름달이 떠오른 웨량산 밤하늘의 색”이라고 말했다. 펑황고성에서 만난 ‘염장’ 유대포 노인의 두 손에는 늘 푸른 쪽물이 들었다. 노인의 화포는 시장을 향했고, 먀오족 여성들 화포는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특히 18세기에 중국을 떠나 라오스로 건너왔다는 먀오족의 한 갈래, 몽족을 추적하는 일은 ‘쪽빛 미스터리’를 푸는 것과도 같았다. 물어물어 찾아간 그들의 마을. 소수민족의 수난사를 알게 되면서 지은이는 전통 염색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마저 내려놓는다. “결국 몽족과 그녀들의 화포를 찾아 헤맨 내 발걸음도 내 안의 잣대만으로 다른 것에 눈감아버리는, 순수 혈통에 집착하는 뿌리 깊은 이기심과 닮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낯선 곳을 방문한 여행자의 자세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여행이 때론 누군가에게 모독일 수도 있었다.” 그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 누르기를 주저하고, 찍어 온 ‘기념사진’조차 책에 싣지 않은 건, ‘기원’을 찾아 헤매는 고단한 ‘쪽빛 탐정’에게 신원을 묻지 않고 기꺼이 따뜻한 자리와 음식을 내주며 환대해준 사람들에 대한 예의였다.

염색을 공부하는 ‘학인’으로서 화포 제작법, 역사적 검토, 쪽빛에 얽힌 전설과 소수민족의 고단한 근대사를 지은이는 꼼꼼히 기록했다. 현장에서 어렵게 얻은 지식은 그러나 논문 쓰듯 하기보다 화포처럼 책 곳곳에 은은한 무늬로 만들었다. 편집자가 원고를 처음 접하고 ‘직접 쓴 것이 맞냐’고 물었을 정도로 섬세한 글이 좋다. 전에 없던 독특한 여행작가의 등장. 그는 전화 통화에서 “20살 때부터 고민했던 것,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를 쓸 예정”이라고 후속작 계획을 밝혔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마음산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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