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훈 지음/푸른역사·1만8000원 말 많고 탈 많은 ‘상고사 논쟁’에 또 한 명의 학자가 뛰어들었다. “일종의 ‘역사왜소 콤플렉스’에 시달려온 우리 국민에게 거대한 고조선 상은 큰 위안이 되는 반가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 (그러나)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아름다운 고대사는 그 존재 이유를 점차 상실해가고 있다.” 이처럼 ‘자극적인’ 얘기를, 지난 세기 바로 그 ‘확대된 고조선사’ 연구를 주도한 윤내현(77) 단국대 명예교수의 애제자가 썼으니 더욱 주목받을 수밖에. 그 주인공인 심재훈 단국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펴낸 <고대 중국에 빠져 한국사를 바라보다>에서 다짐대로 “고조선 거품 빼기”를 시도하고 있다. 책은 지난해 6월부터 올 4월 중순까지 페이스북에 연재했던 글을 묶은 것으로, “대중서에 가깝”다. 하지만 고조선 문제만큼은 다르다. 그는 2002년 <하버드 아시아학 저널>에 실렸던 자신의 논문 ‘역사적 시대착오로서 기자조선(箕子朝鮮)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학계 안팎 일부 인사들의 고조선 논의가 갖는 ‘부당전제의 오류’를 신랄하게 논박한다. 고조선 대신 기자조선을 주제로 잡은 까닭은, 기자조선에 대한 문헌적 근거가 전제돼야 비로소 고조선의 존재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기자조선설이 ‘입증’되지 않으면 고조선은 존립 근거가 희박해진다. 보자. 중국 고대 국가인 상(商)나라 사람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조선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기자조선설 또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기원전 2세기경 복생이 편찬한 <상서대전>에 ‘최초로’ 등장한다. 그 내용이 사실이라 해도 기자가 동쪽으로 간 것은 기원전 11세기의 일이니, ‘단군기년’이라는 기원전 2333년과는 1천년 안팎의 시차가 난다. 기자조선의 ‘조선’과 고조선의 ‘조선’이 동일한 정치체인지를 별론으로 하더라도, 이 간극은 메울 길이 없다. 일부에선 1970년대 중국 다링하(대릉하) 유역에서 ‘기후’(己+基侯)라고 새겨진 상말주초 청동기가 발굴된 점을 들어 기자조선이 이 일대에 실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서대전>이 편찬된 시기를 고려하면 거대한 연대 편차가 벌어지기는 마찬가지다. 고조선 논의 전제 기자조선
“‘만들어진 역사’ 가능성 높아”
심재훈 교수, 조목조목 논박 게다가 <상서대전> 이전 ‘기자’가 등장하는 문서들에는 ‘조선’에 대한 언급이 없다. 기자가 처음 기록된 시점은 기원전 9세기경인 반면, 그가 기자조선의 시조로 언급되는 것은 7세기쯤 뒤인 한나라 시대에 들어서다. 진나라 이전, 즉 선진(先秦) 문헌에 없던 기자조선은 이처럼 한대에 ‘갑자기’ 출현한 뒤 “갈수록 세밀하게 증폭되어 나타난다.” <상서대전>과 <사기>에서 기자는 조선으로 이주하고 분봉을 받은 것으로 간단히 취급된 인물이었지만, <한서>에선 조선을 교화시킨 문화적 영웅이 되고, <삼국지>에선 자자손손 40대를 이어가는 조선 통치가문의 시조로 “둔갑한다.” 이런 양상 때문에 심 교수는 기자조선설이 중국의 역사가 구제강(顧?剛, 1893~1981)이 말한 ‘누층적으로 만들어진 고사(古史)’가 아닐까 의심한다. 실제로 기자는 한대에 재평가됐다. 한이 오행 등 유교를 통치철학으로 채택하면서, 이미 수백년 전 그 중요성을 깨닫고 주 무왕에게 이를 ‘전수’한 기자가 역사적 현인으로 떠받들리게 된 것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그의 ‘행방’이 중대 관심사로 부각될 즈음, 한의 역사인식 범주 안으로 동북방 조선이 들어온다. 그 지역에 설치한 낙랑 등 ‘군현’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한나라판 동북공정’의 결과 기자는 마침내 조선과 ‘연결’된다. 물론 고조선의 실재 여부와 기자조선의 관계는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다.
심재훈 교수는 “비파형 동검이 고조선의 전유물이라는 근거는 사실상 없다”며 이 동검을 근거로 고조선의 존재를 입증하려 드는 학계 일부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비파형 동검.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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