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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장정일 스승’ 박기영 시인, 사반세기 만에 돌아오다

등록 2016-08-11 19:19수정 2016-08-11 19:24

음식주제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옥천 자택서 문우들과 출판기념회 열어
이하석, 송찬호, 안도현, 신이현 등 참석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박기영 지음/모악·8000원

“나의 스승이신 박기영 형께 이 유고시집-세상의 모든 시집은 다 유고시집이지요-을 바칩니다.”

장정일의 놀라운 첫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 앞에는 이런 헌사가 놓였다. ‘유고시집’ 운운은 젊음 특유의 치기의 표현이라 치더라도, 그가 스승이라 부른 박기영이라는 인물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1980, 90년대 한국 문학의 앙팡 테리블이라 불리는 장정일의 문학 스승 박기영은 과연 누구인가.

대구 달성고를 중퇴한 뒤 중국집 배달 일을 시작으로 숱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문학을 독학한 박기영은 1979년 중학교 중퇴생인 열일곱살 장정일을 처음 만나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장정일의 두번째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1988) 맨 앞에 실린 시 ‘삼중당 문고’ 중 “박기영 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라는 구절에도 등장하는데, 실제로 장정일과 박기영은 <성(聖)·아침>(1985)이라는 2인 시집을 낸 바 있다. 박기영 자신은 198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장정일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도 활동했고, 1991년 첫 시집 <숨은 사내>(민음사)를 냈다.

첫 시집 이후 25년 만에 두번째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낸 박기영 시인. 후배 시인 안도현은 “문청 시절 박기영은 우리 중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첫 시집 이후 25년 만에 두번째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낸 박기영 시인. 후배 시인 안도현은 “문청 시절 박기영은 우리 중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박기영은 시와 무관한 삶을 사는 듯했다. 그의 ‘제자’ 장정일이 시에 이어 소설로 영역을 넓히고 독서일기 여러 권을 비롯한 산문집을 내는 세월 사반세기가 속절없이 흘렀다. 그 사이 그는 방송작가와 프리랜서 연출가를 거쳐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2002년 귀국했다. 돌아온 그는 충북 옥천 금강가에 자리를 잡고 옻된장을 비롯해 옻과 관련한 음식과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그렇게 시를 아예 잊은 듯했던 그가 시로 돌아왔다. 무려 25년 만에 낸 두번째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이 그의 시 복귀 신고작이다.

“식당 문 열고 들어가면/ 서툰 솜씨로 차림표 위에 써놓은 글씨가/ 무르팍 꼬고 앉아, 들어오는 사람/ 아니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옻오르는 놈은 들어오지 마시오.’// 그 아래 난닝구 차림의 주인은/ 연신 줄담배 피우며/ 억센 이북 사투리로 간나 같은/ 남쪽 것들 들먹였다.// ‘사내새끼들이 지대로 된 비빔밥을 먹어야지.’”(‘맹산식당 옻순비빔밥’ 부분)

맹산식당은 평안도 맹산 포수 출신인 그의 부친이 대구에 냈던 옻 전문 식당이다. 아버지가 싫고 문학이 좋아 고등학교도 중퇴했던 아들이 그로부터 수십년 세월이 지나 그 스스로 옻을 생업으로 삼게 된 섭리가 얄궂다기보다 신비롭다.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에는 잡지 등에 발표된 적 없는 신작시 50편이 실렸는데 거의 모든 작품이 음식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 이채롭다. 오소리술, 어육계장, 곰순대, 꿩냉면, 청국장반대기, 도리뱅뱅 등 제목만으로도 입에 침이 돌게 하는 것들이다. “한 보름 길도 없는 산, 눈발 헤치며/ 짐승 쫓아 헤맬 때 주머니에 싸고 다녔다는 음식./ 소금과 청국장 손바닥으로 다져/ 숯불에 구웠던 세월.”(‘청국장반대기’)처럼 아버지의 야성과 북방 정서를 되새긴 작품이 있는가 하면, 젊은 시절 ‘제자’ 장정일과 선배 시인 이하석과 어울려 문학과 인생을 배우던 술자리를 회고한 작품도 보인다.

“염매시장 모퉁이 수육집/ 시를 쓰는 선배가 토렴 치듯 언어를 흔들고/ 까까머리 소년과 나는/ 소림사 무협지 같은 노인 칼솜씨에/ 정신이 팔렸다.// 칼은 저렇게 움직여야 해/ 아무 표정 없이 상대방 살을 가르고/ 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게/ 뼈 가르고, 언어와 기교로 제압해야 해.// (…) // 서른 넘은 시인과/ 총각배기 문청 둘이 허기진 마음 채우기 위해/ 탁자에 오른 수육 같은 언어/ 오랫동안 묵묵히 씹어 먹고 있었다.”(‘염매시장 수육’ 부분)

시집 발간 축하모임에서 참석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박기영 시인.
시집 발간 축하모임에서 참석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박기영 시인.
9일 저녁 박기영의 옥천 집에서는 시집 발간을 축하하는 모임이 열렸다. 시집에 발문을 쓴 이하석 시인, 장정일 시 ‘삼중당 문고’ 중 “계대 불문과 용숙이와 연애하며 잊지 않은 삼중당 문고”라는 대목에 등장하는 소설가 신이현(본명 신용숙), 옥천에서 멀지 않은 보은에 사는 동갑내기 시인 송찬호, 대구 출신 후배 시인 안도현, 그리고 박기영의 고교 동창을 비롯한 대구의 59년 돼지띠 동갑내기 시인들과 후배 시인들로 자리는 풍성했다. 송찬호 시인은 “박기영의 25년 공백이 안타깝지만, 첫 시집에서 보았던 유장한 가락과 긴장감이 사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게 반갑고 고맙다”고 말했다. 이하석 시인도 “가히 파란만장이라 할 만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도 시를 놓아 버리지 않은 게 놀라운데, 다시 생각하면 바로 그 힘으로 세월을 버텨 온 게 아닌가 싶다”는 말로 ‘돌아온 탕아’의 시 복귀를 축하했다.

옥천/글·사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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