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유민석 옮김/알렙·1만8000원
지난해부터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군 ‘혐오 발언’ 논란. 이제 그날그날 발생하는 사건을 따라가기조차 힘들 지경이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끝없이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이 효과가 있을까? 웬만한 건 무시하고, 심각한 발언은 단호하게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혐오 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Excitable Speech: A Politics of the Performative, 1997)은 미국의 철학자, 퀴어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61·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가 언어·발화와 관련해 쓴 중요 저작. 영국 언어철학자 존 랭쇼 오스틴, 루이 알튀세르를 경유한 버틀러의 수사학을 소상하게 밝힌다. ‘혐오의 시대’를 맞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또다시 뜨거운 비평적 담론을 촉발할 만큼 논쟁적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사회적 성을 가리키는 ‘젠더’가 원본 없는 문화적 전략이며 반복, 모방이라는 주장(<젠더 트러블>)을 한 바 있다. <혐오 발언>에서도 그는 발화자가 말을 반복할 뿐, 원저자가 아니었음을 강조하며 말의 권력을 해체한다. 알렙 제공
버틀러는 이 책에서 다양한 형태의 ‘상처 주는 말’(injurious speech)을 설명하면서 혐오 발언 규제, 반포르노그래피 논증, 군대 내 동성애자의 자기선언, 국가 검열 등의 논쟁을 검토한다. ‘혐오 발언’(hate speech)은 책의 핵심인데, 특히 버틀러가 여러 페미니스트·반인종차별주의 이론가들의 주장을 설명하며 조목조목 반박하는 내용이 중요하다.
버틀러가 거론한 이론가들은 혐오 발언이 ‘그냥 말’이 아니라 ‘언어적 따귀’라고 본다. 폭력적으로 침묵을 강요하며 차별을 실행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반포르노 활동을 펼친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은 포르노그래피가 일종의 혐오 발언이며 여성을 종속적 위치에 두면서 사회적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버틀러는 “포르노그래피의 권력은 효력적이지 않다”며 차별·혐오적 ‘말’이 곧바로 상처가 되며 행위로 연결된다는 점을 의심한다. 혐오 발언은 강자의 차별을 정당화하고 약자들을 발언하지 못하도록 침묵시킨다(레이 랭턴)는 대부분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다.
왜일까. 먼저 버틀러는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 등 상처주는 말을 하는 이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권력을 가졌다는 전제를 해체하려 한다. 말하는 자는 그 발언의 창시자가 아니며, 말은 항상 통제할 수 없다. 말의 의미는 끝없이 변화·탈선하고, 청자의 개입에 따라 발화자의 의도와 정반대의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이 고통을 야기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혐오 발언의 실패가 비판적 대응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더욱 집중한다.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 개입과 법적 규제는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안이다. 버틀러는 원칙적으로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반대한다. 혐오 발화자를 기소하지 않거나 면책해주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법의 호명에 신성한 권력, 마법 같은 효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법적 조치는 수신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며 부르르 맞받아치는 말도 함께 금지할 수 있다. 정치적 중립이 의심스러운 국가의 판결은 소수자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법의 말, 국가의 발언, 공적 영역의 목소리는 주로 주류 쪽의 언어나 견해다. “(약자를 보호하려는) 입법 의도는 국가에 의해 불가피하게 오용된다”고 그는 말한다.
대신에 버틀러는 ‘맞대응’을 제안한다.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저항적 전유나 재수행”, 곧 정치적 실천으로서 맞받아치기, 전복하기, 해체하기 등이다. ‘퀴어’라는 욕설을 동성애자들이 해방적으로 바꿔버린 것이 한 예다. (우리나라에서도 ‘잡년 행진’ 등의 사례가 있다.) 주변화된 비주류는 말을 재맥락화하고 재구성해 혼돈을 만들고 개입하며 ‘기원’을 해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혐오 집단의 위협은 개인의 안전과 생존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폭력적(마리 마츠다)일 수 있는 까닭이다. 언어를 재가공해서 저항하고 전복하는 일을 ‘민주적 해법’이라고 제안하는 버틀러의 사유가 엄혹한 현실에서는 너무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만 ‘국가가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는 버틀러의 공식은 국가안보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나머지 퇴행적인 모습까지 보이는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데 힌트가 될 것 같다.
2012년, 아도르노 상을 받는 주디스 버틀러. 그의 문체를 놓고 마사 누스바움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모호하고 불필요하게 압축적이라 비판한다. (우익 경향의) 학술지가 주는 ‘최악의 문체’ 상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이론은 여전히 학계에 큰 영향력을 끼치며 인정받는다. 알렙 제공
옮긴이 유민석(서울시립대 철학과 박사과정)씨는 랭턴과 버틀러의 혐오발언 관련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철학도. 2년 동안 이 책을 번역하고 연구해온 그는 “혐오 발언에 저항할 것을 제안하는 이 책이 한국 사회의 ‘메갈리안들’에게 정당성을 줄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사회적 약자가 말을 되받아치는 것 자체가 언어권력을 전복하는 의미”라는 것이다.
메갈리아안 로고. ‘일베’의 손가락질을 본떠 만든 이 상징에 대해 ‘일베와 같은 혐오 표현’이라는 비난도 있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을 예상치 못한 응수로 회복하는 것이 저항이 된다고 본다. 메갈리안 누리집
그러나 ‘미러링’ 전략이 과연 장기적으로도 유효할까. 배은경 서울대 교수(사회학·여성학)는 의문을 제기한다. “‘헤이트 스피치’는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정치적 폭력, 언어폭력의 맥락을 갖고 있는데 이를 약자가 그대로 되받아치는 모습을 볼 때, 구경꾼들은 ‘상호 폭력’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일베’와 ‘메갈리안’을 똑같은 혐오 발화자라고 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에 배 교수는 “책의 원제인 ‘익사이터블 스피치’를 적절하게 번역·변용하는 작업이 도움이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 용어는 혐오 발언 수신자들이 대응할 수 있는 언어적 가능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익사이터블 스피치’는 흥분하기 쉬운 말, 격분시키는 말, 자극적인 말 등으로 옮길 수 있지만 정확한 뉘앙스 전달이 힘들다. 출판사와 옮긴이가 긴 고민 끝에 한국어판 제목을 <혐오 발언>으로 결정한 까닭이기도 하다. 책 제목 자체가 버틀러 이론의 난해함과 모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말을 비틀고 재창조하며 언어적 환상을 부수는 버틀러의 노림수를 발견하는 것도 악명 높은 버틀러를 ‘해독’하는 맛이라면 맛이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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