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왼쪽부터 <나쁜 페미니스트>의 작가 록산 게이, 일본 페미니스트 학자 우에노 지즈코, ‘페미니스트의 대모’ 시몬 드 보부아르, <성의 변증법>을 쓴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미국의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미즈>를 창간한 글로리아 스타이넘.
“페미니즘 출판 전쟁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 요즘 출판계의 목소리다. 17일 현재, 교보문고 서울 광화문점 정치·사회 베스트셀러 매대 1위, 5위, 7위, 10위에는 여성학 분야 책들이 올라 있다. 올해 여성학·젠더 분야의 책들은 90~100여종이 발간될 것으로 보이는데 하반기에만 20~30권 정도가 ‘출정’을 기다린다. 출간 물량으로도, 판매량으로도 전례가 없다.
지난달 7일 첫선을 보인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봄알람)은 발간 한달여 만에 1만부 가까이 책이 팔려나가 벌써 2판 3쇄를 찍고 있다. 지난 3월 발간된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는 다섯달 만에 1만7000부가 소진되었다. 지난해 5월 출간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는 1년 3개월 만에 2만부, 올 1월 나온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는 일곱달 동안 누적 판매부수 1만5000부를 기록했다. 창비 최지수 편집자는 “메갈리아 티셔츠, 강남역 살인사건 등 이슈가 있을 때마다 주문이 눈에 띄게 상승하곤 했었다”고 말했다. 사회 이슈와 관련 콘텐츠가 끊임없이 생산되면서 페미니즘 출판 전쟁을 ‘쌍끌이’ 하고 있는 셈이다. ‘돈 안 되던 페미니즘’이 불황에 빠져 어깨 처진 한국 출판계에 활력을 주고 있는 모양새다.
우선 온라인서점 알라딘의 집계를 보면, 올해 1~7월 ‘여성학/젠더’ 분야 도서 판매량은 작년 같은 기간에 견줘 2배가 넘는 178% 증가율을 기록했다. 온라인서점 예스24에서도 같은 기간 ‘여성/페미니즘’ 분야 도서 판매 증가율이 올해 114.7%로 나타났다. 교보문고의 같은 분야 판매 증가율은 지난해 77.5%, 올해 41.3%였다. 2011~2014년 대부분 서점에서 페미니즘·여성학 도서 판매량이 매년 마이너스를 기록했던 것에 견주면 최근 2년 새 페미니즘 도서의 인기는 폭발적이라고 할 만하다. 알라딘 박태근 인문엠디는 “사회과학분야 전체 매출 변화는 크지 않은데, 여성학·젠더 책들이 특히 독보적 활약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연령층 변화도 눈에 띈다. 예스24의 경우, 작년 1~7월 여성학 분야 책을 산 20대 여성은 총 구매자의 14.1%에 불과했지만 올해는 33.2%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교보문고 역시 여성학 분야 책의 20대 여성 구매자가 지난해 29%대였지만 올해는 35.42%로 성별·연령별 구매율 1위를 차지했다. 알라딘 또한 여성학·젠더 분야 독자층 가운데 20대가 47.2%로 압도적이었다. 2년 전부터 페미니즘 책을 꾸준히 읽어왔다는 대학생 강민경(23)씨는 “지금까지는 페미니즘 책만 들고 다녀도 ‘왜 이런 것에 관심이 많냐’ ‘남자친구가 싫어할 것’이라는 등 놀리는 듯한 얘기를 들었지만,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주변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들녘의 현미나 편집자는 “평소 페미니즘 관련 강의나 행사를 가더라도 20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반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열기가 확실히 느껴진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이론서’에서 ‘페미니즘 대중서’로 책 내용의 변화도 뚜렷하다. ‘지금, 여기, 나 자신’이 겪는 이야기를 또래 집단이 쓰고, 읽으며 지지하는 흐름 속에 일상의 고통을 ‘현실 언어’로 해석하고 제안하는 책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매일매일 학교나 직장에서, 온라인에서 일상적으로 남성들의 거친 욕설, 음란한 언어에 심각하게 고통받는 여성들의 현실을 잘 설명해주고, 맞서 싸우는 실천을 매뉴얼화하거나 승인해주는 페미니즘 책들이 팔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메갈리아 이후 등장한 많은 여성들의 분노와 결부된 미러링, 이른바 ‘새로운 정의감’을 반영하는 책들이 일상적인 ‘여성혐오 시대’를 살아가는 20대들에게 공감을 준다”는 진단이다.
하반기에 출간될 20~30여종의 페미니즘 분야 도서들 가운데는 우에노 지즈코, 글로리아 스타이넘, 나오미 울프, 낸시 프레이저 등 유명 페미니스트 학자, 저술가, 저널리스트들의 굵직한 화제작들이 줄을 잇는다. 8월 말 발간될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머 오툴, 창비)는 통쾌한 재미와 전복적인 의미 양쪽으로 기대감을 끌어모은다. 10대 시절 “한번도 성차별을 겪은 적이 없다”며 ‘안티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그는 어느날 자신이 여자다움을 연기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남장하기, 삭발하기, 겨드랑이 털 기르기, 여자와 섹스하기, 일상 언어에서 남녀 구분 없애기, 친척 모임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기 등 다양한 실천을 거듭했다고 한다.
‘인터넷 페미니즘’이나 ‘미러링’에 대한 진지한 접근도 선보일 예정이다. <여성혐오 이후의 페미니즘>(가제·들녘)을 집필중인 이현재 서울시립대 교수는 “젠더 이분법적인 체제를 교란시키고 잡힐 수 없는 존재(비체)로서 여성의 전략을 재구성하는 일이 필요해 그 논의를 중심으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그밖에도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맹활약한 영 페미니스트들의 경험과 각성을 다룬 대중서 <페미니스트 모먼트>(권김현영·손희정·한채윤 외, 그린비)가 준비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 소녀가 재현되는 방식을 다룬 <소녀들>(여이연)도 연말까지 만나볼 수 있을 듯하다. 인터넷 문화나 군 복무, 데이트 폭력 등 여성혐오 논란과 거리가 멀지 않은 뜨거운 이슈를 짚어보는 <페미니즘이 뭐길래>(윤보라 외, 은행나무)와 한국 페미니즘의 오해와 진실을 다루는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김미덕, 현실문화)도 하반기 기대작이다.
‘페미니즘 출판 전쟁’의 배경에는 손희정, 윤보라, 전희경씨 등 쟁쟁한 글솜씨로 손꼽히는 저자들의 약진과, 아카데미아 안팎에서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해온 편집자들의 활약이 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한 사이행성의 김윤경 대표는 “1990년대 후반 영 페미니스트들의 등장과 페미니즘 대중화의 자장 속에서 20대를 보낸 경험과 여성학을 공부하며 얻은 지식도 페미니즘 출판 기획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역시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한 김주원 현실문화 편집자는 “페미니즘을 일종의 ‘상품’으로 소비하는 것이라 비판할 수도 있지만, 요즘 같은 사회과학책 판매 가뭄 속에서 벌어지는 ‘페미니즘 출판 전쟁’은 이 분야를 공부한 편집자로서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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