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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화려한 백화점은 잔인한 ‘노동 백화점’

등록 2016-08-25 19:24수정 2016-08-25 19:46

저임금 장시간노동 대명사 ‘백화점’
민우회 액션단 여성노동자 인터뷰
IMF 뒤 양산된 여성비정규직 육성
백화점 판매직 여성노동자들의 가장 큰 고통은 매출 압박. 매출을 맞추려고 자신의 돈과 카드로 먼저 매출을 일으키는 ‘가매출’을 쓰는데, 결국 개인 빚으로 쌓이는 수가 많다. 그린비 제공
백화점 판매직 여성노동자들의 가장 큰 고통은 매출 압박. 매출을 맞추려고 자신의 돈과 카드로 먼저 매출을 일으키는 ‘가매출’을 쓰는데, 결국 개인 빚으로 쌓이는 수가 많다. 그린비 제공
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 -상품 뒤에 가려진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
안미선·한국여성민우회 지음/그린비·1만9000원

“백화점은 잔인해요. 사람을 기름틀에 쥐어짜면 무언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곳이에요. 날이면 날마다 악몽 그 자체예요. (…) 매출 목표를 달성하려면 가랑이가 찢어져요.”(백화점 식품매장 노동자)

“우리가 이렇게 예쁘게 하고 매장에 서 있지만, 그 내면에 들어가 보면, 일하기 진짜 힘들어요. 성희롱도 일어나요. (…) 백화점이 와서 말려줄 것 같아요? 안 그래요.”(화장품 매장 노동자)

화려한 인테리어, 극진한 서비스로 돈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비의 즐거움을 최대로 누리게 하는 백화점. 번쩍이는 ‘신상’ 뒤에는 그러나 매장에서 앉을 권리, 물 한 잔 마실 권리조차 없는 노동자들이 있다. 창문 하나 없는 곳, 동료와 일상적인 대화조차 금지된 가운데 하루 종일 일하는 이들은 스스로 ‘사람’보다 ‘물건’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고 했다.

<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는 백화점 여성노동 실태를 밝힌 책이다. 2013~15년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과, 민우회가 모집한 시민모임 ‘우다다 액션단’(우리가 간다! 바꾼다!)이 조사한 결과를 종합했다. 2013년 백화점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 두 사람이 “사람들 그만 괴롭히세요” “더 이상 백화점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등의 메시지를 남기고 잇따라 목숨을 끊은 사건이 계기가 됐다. 액션단과 회원들은 2년 동안 499개 백화점 매장을 관찰했고, ‘스태프 온리’라고 적힌 금지구역 안에도 들어가 노동자들의 공간 실태를 살폈다. 여성노동팀이 인터뷰한 백화점 노동자 14명 중 12명의 이야기도 함께 모아 안미선 작가가 집필했다.

그린비 제공
그린비 제공
책갈피를 넘길수록 화려한 백화점의 어두운 이면이 낱낱이 드러난다. 점점 더 많은 매출을 요구하는 백화점, 하루 12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근무, 휴게시간 부족과 휴게시설 미비, 모욕감을 주는 감정노동, 손님으로 가장해 불시에 노동자를 평가하는 ‘미스터리 쇼퍼’ 제도, 시시티브이(CCTV)를 활용한 촘촘한 감시망과 자세까지 규율하는 업무 지시, 고용의 불안정성…. 백화점에는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고용 문제가 똘똘 뭉쳐 있었다.

백화점 여성노동자들은 판매상품 브랜드의 이미지에 맞게 신체와 외적 상태를 갖추는 ‘미적 노동’을 한다. 화장, 헤어스타일, 매니큐어, 신발과 옷차림, 자세까지 규정에 따른다. 남성은 긴 머리를 하지 말고, 담배 냄새를 풍기지 말라는 규정 정도에 그친다. 온종일 서서 일하며 하루 세 번 이상 화장실 가기 힘들어 방광염, 하지정맥류, 근골격계 질환에 걸리는 수도 헤아리기 어렵다.

가장 큰 고통은 매출 압박. 백화점 판매직 여성노동자들은 간접고용된 이가 대부분이지만, 매출을 맞추려고 사비를 들이는 경우가 많다. 마치 매출이 일어난 것처럼 자기 돈과 카드로 상품을 사두고, 나중에 매출이 발생하면 구매 취소를 하는 편법(가매출)을 쓰는 것이다. 가매출은 결국 개인 빚이 되기도 하는데, 카드 지출과 실제 들어오는 돈이 어긋나며 빚이 불어난다. 인터뷰를 한 어느 백화점 잡화매장 노동자는 빚을 1억원 진 뒤 수면제를 먹었다고 했다. “돈을 갚을 능력은 안 되고 남편에게 말을 하자니 남편을 죽이는 것 같고요.” “이쪽(백화점)에서는 막 쪼아대지요. (…) 카드회사에서는 돈 갚으라고 하지요. (…) 그래서 또 뛰어내렸잖아요, 참 많이.”(잡화매장 노동자)

백화점 노동자들은 “직원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서비스 노동의 핵심적인 부분인데, “고객이 매장에서 내 얼굴에 침을 뱉고, 뺨도 때리고, 그래서 무릎 꿇고 사과도 했다”는 경험은 단지 한두 사람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무수한 판매노동자의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백화점에서 그런 사람을 제지를 못해요. 매출을 내주니까.”(화장품 매장 노동자) ‘진상고객’ 문제도 원인 제공자는 백화점이라고 책은 밝힌다. 몇 년 지난 제품을 환불해달라는 등 추태 부리는 ‘진상’을 받아주더라도 입점 업체만 손실을 입을 뿐, 백화점에는 큰 손해가 없기 때문에 판매직원들의 고통에 무관심하다. 백화점의 방관과 조장을 방패 삼아 고객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노동자를 무릎 꿇린다. 백화점에서 ‘갑질과 묵인’이 거듭되는 이유다. 지은이들은 이렇게 분석한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본적인 규칙들, 인권의식 등이 백화점 안에만 들어오면 다 무화되어 버린다. 이곳을 지배하는 법도는 오로지 ‘매출’, 그리고 그 매출을 실현해주는 고객의 만족이다”.

백화점 노동환경의 변화는 외환위기,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 사태가 결정적 원인이었다. 재벌과 대기업 위주로 유통업 구조조정이 이뤄진 것이다. 그 뒤 10년 사이 백화점 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백화점은 매출난 타개를 위해 ‘서비스 향상’ 전략을 진행했다. 특히 여성비정규직을 양산한다며 여성계가 극렬하게 저항했던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1998년 시행)은 결국 파견근로자 ‘보호’는커녕, 기업의 배만 불린 기만책으로 드러났다. 백화점 정직원 여성노동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2013년 상반기 유통업 업태 조사에서 전국 77개 백화점 매장의 직영사원은 전체 종사자의 10~20% 이내, 협력업체 소속 사원은 전체 종사자의 80% 이상이었다. 계약직, 용역직, 파견직, 일용직, 임시직,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비정규직인 백화점 여성노동자들은 “해고는 너무나도 쉽다” “삼중고용이다” “여기저기 치이는(…) 파견사원” “아웃소싱이 정직원 되는 게 정말 드물다”고 입을 모았다. 백화점 직원이지만 직원이 아니기에 일상적으로 해고 위협에 시달린다. 갑을관계, 원청과 하청, 고용불안이 거듭된다. 그나마 여러 관행이 개선된 곳은 로레알 코리아 노동조합처럼 노조가 있는 곳이지만, 극히 일부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추천사에서 이렇게 썼다. “이 책은 1997년 이전의 노동 환경을 무슨 유토피아처럼 생각하도록 만든다. 고작 20년 만에 이렇게 우리가 망가져버린 것이다. (…)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백화점 판매노동자들은 고객용 화장실과 엘리베이터도 함께 쓸 수 없다. 그린비 제공
백화점 판매노동자들은 고객용 화장실과 엘리베이터도 함께 쓸 수 없다. 그린비 제공
압축적 경제개발시대를 거치면서 뿌리 깊은 병폐가 된 갑을문화의 전근대적 관습, 감정노동을 이용한 매출증대를 주된 전략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영전략이 여성노동자들을 차별과 극단적인 노동환경으로 내몰아 왔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편안하고 흥미롭게 읽히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외환위기 뒤 ‘파견근로자 보호’ ‘노동시장 유연화’ ‘경제회생’ ‘조직생존’을 명분으로 국가와 사회가 여성노동자들에게 어떤 희생을 강요해왔는지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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