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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요즘 페미니즘’ 유쾌하거나 진지하거나

등록 2016-09-08 19:32수정 2016-09-08 22:45

페미니즘에 덧씌운 오명 밝히고
가정폭력 경험담까지 다채로워
고대~현대 한국여성사도 재조명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가부장제, 젠더, 그리고 공감의 역설
김미덕 지음/현실문화·1만8000원

사랑에 미치지 마세요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 지음, 안유정 옮김/필요한책·1만5000원

여자다운 게 어딨어 -어느 페미니스트의 12가지 실험
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창비·1만6000원

글로벌시대에 읽는 한국여성사-통제와 주체 되기 사이에서
정현백, 김선주, 권순형, 정해은, 신영숙, 이임하 지음/사람의무늬·1만5000원

젠더, 여성학 분야 신간들이 부쩍 다채로워지고 있다. 유쾌·상쾌·통쾌하게 기존 젠더 질서를 뒤집는 실험을 보여주거나, 진지하게 여성주의에 대한 오해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책, 또는 ‘로컬’의 여성사를 복원하며 옛 여성들을 주체로 재조명하는 역사서까지.

페미니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세계적 흐름이다. 출판사 자음과모음 조동신 기획실장은 “도발적인 주장을 담은 20대 페미니스트들의 책들이 세계 곳곳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으며, 수십년 전 서구에서 주목받았지만 그간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작품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고 말했다. 추석을 즈음하여 출간된 이 분야 책 몇권을 소개한다.

출판사 현실문화는 <페미니즘의 검은 오해들>을 출간하며 “잡다한 페미니즘서가 봇물 터진 시점에 ‘진지한 페미니즘’을 말하는 책”이라고 밝혔다. 본문만 총 200여쪽의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무거운 통찰과 날카로운 질문을 담고 있다. 젠더정치, 정치사, 비교정치론과 정치인류학을 전공한 지은이 김미덕 박사는 “사회정의를 고민하는 한 장”으로서 페미니즘의 이론적 스펙트럼을 살핀다. 주류학계가 여성학을 ‘반쪽짜리 학문’에 불과하다거나 ‘불완전하다’며 폄훼하고, ‘한국 페미니즘’도 서구중심적이라고 비판하지만 사실은 그런 주장 안에 가부장적 속성과 엘리트주의가 내장돼 있다는 점도 밝힌다.

지난 3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행진 장면. DPA 연합뉴스
지난 3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행진 장면. DPA 연합뉴스
이 책이 논쟁적인 이유는 페미니즘이 ‘여성’이라는 단일 범주를 상정할 때 생기는 한계와 비판 또한 함께 제출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주류 페미니즘인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지식 공동체 안에서 여성 사이의 ‘차이’를 포섭해왔다고 본다. ‘지식 생산’ 자체가 배제와 특권을 포함한 끝없는 긴장의 과정이기도 하거니와, 페미니스트 공동체 안에서 인종·계급·연령·학령 등 위계에 따른 가부장제가 재생산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더불어 페미니즘을 인정한다고 밝히는 남성 지식인들의 태도가 왜 불편한지, 사회정의를 지향하는 공동체 안에서 왜 윤리적 언술이 과잉되는 반면 일상적 실천에서는 무책임한 태도가 만연한지 등에 대한 질문도 제기한다. 콕 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이물감을 주었던 ‘진보’ 또는 ‘좌파’ 내 권력의 문제를 짚어 페미니즘 대중서와 또 다른 후련함을 주는 것이다. 성별 불문, 엘리트들의 위계적 자세와 시선에 대한 성찰을 유도하는 만큼, 더욱 매력적인 책이다.

<사랑에 미치지 마세요>는 지은이인 ‘배운 여자’ 레슬리 모건 스타이너의 자기고백록이다. 하버드대와 와튼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유명 틴에이저 잡지와 존슨앤존슨 등에서 착실히 경력을 쌓은 지은이는 지독한 가정폭력 피해자. 어린 시절 학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좋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의 위험성, 그럼에도 왜 그 남자한테서 탈출하지 못했는지 경험담을 소설에 가까운 에세이 형식으로 담았다. “왜, 어떻게 배울 만큼 배운 나 같은 여자가 그런 파괴적인 관계에 끌려 다녔던 걸까?” ‘사랑하므로 때린다’는 가학적인 남성들의 실체, ‘미친 사랑’(원제, Crazy Love)의 문제를 고발하는 지은이는 학대받는 여성을 만나면 ‘왜 폭력적인 남자한테서 벗어나지 않느냐’고 묻는 대신 피해자를 도울 방법을 찾으라고 권한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재혼을 하고 아이 셋을 둔 뒤에도 전 남편이 등장하는 악몽을 꾸었다는 지은이의 생존기는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의 문제가 ‘사랑 싸움’으로 치부되고 마는 한국 사회에도 울림을 준다. 1인 출판사 ‘필요한책’의 첫 책.

4년 전, 영국 방송에서 두팔을 번쩍 들어올리며 털이 숭숭난 겨드랑이를 드러내 화제가 된 연극학자 에머 오툴은 제모, ‘뽕브라’, 압박스타킹, 성형, 각종 화장품으로 날씬하고 매끈한 몸 만들기를 칭송하며 ‘여자다움’을 강요하는 젠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든다. (한국에는 ‘20대 영국 겨털녀’로 소개되기도 했다)

2014년 10월 미국 마이애미주에서 여성들이 가정폭력 및 데이트폭력의 실상을 알리는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14년 10월 미국 마이애미주에서 여성들이 가정폭력 및 데이트폭력의 실상을 알리는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여자다운 게 어딨어>는 제모 거부, 남장, 삭발, 여자와의 섹스, 가족모임에서 (남자형제들이 하는 것처럼) 부엌일 하지 않기 등을 실천한 지은이의 경험을 담았다. 지은이는 10대 때 식이장애로 쓰러진 적이 있으며 성차별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던 ‘안티 페미니스트’였다고 한다. 열정적인 페미니스트로 ‘전향’한 그는 젠더가 일종의 의상이고, 학습된 연기 방식의 하나임을 알게 되면서 젠더 차이를 해체하고 복잡하게 뒤섞기 시작했다. 젠더를 다르게 수행하는 데 좋지 않거나 폭력적인 반향이 따를 수 있다고 한 주디스 버틀러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도 “고통을 면하기 위해 여성을 무력화하는 체제에 순응하는 것은 체제 자체의 변화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글로벌시대에 읽는 한국여성사>는 원시·고대사회부터 고려, 조선, 근대, 현대까지 한국 사학계에서 그동안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의 경제생활, 사회활동, 일상생활을 밝히는 ‘한국 여성의 역사’다. 고대사회에서는 여성의 경제생활, 종교적 권위, 정치적 비중이 컸다고 한다. 고구려 때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남자가 여자 집에서 거주하는 ‘서옥제’가 있었고, 고려 때는 아들·딸에게 똑같이 상속이 이뤄졌으며 여성들은 자기 재산으로 상업과 무역업을 했다. 18세기 중반 이후 여성의 상속분은 줄어들었으며 여성은 친정에서도 멀어졌다. 조선의 정책에 반발해 청상과부가 된 양반집 여성이 수절이나 따라죽기를 거부하고 가출했다는 기록도 있다. 부록으로 실은 ‘한국여성사 주요 연표’는 기원전 57년 알영이 비(妃)로 봉해졌던 때부터 현대의 여성운동까지를 담았다. 1980년대 <창작과비평>에 여성사를 연재하며 주류 사학계에 경종을 울렸고 오랫동안 시민운동에 투신해온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를 비롯한 여성사학자들 다수가 집필에 참여했다. 명절 때 더욱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여성의 비가시적 노동과 역사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책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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