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기록영화, 그 코드를 풀다
김승 지음/한울·2만7000원
늘 그 무대에 그 얼굴. 거대한 병정놀이 같은 열병식. 광란의 종교 행사를 방불케 하는 기이한 장면들.
이런 걸 찍은 북한의 ‘기록영화’는 제작 편수에서 예술영화를 압도한다고 알려져 있다. 수령, 지도자, 위원장으로 호칭만 어지럽게 바뀔 뿐 ‘3대’째 이어지는 주연과 조연의 면면은 별 변함이 없다. 그래서 북한 기록영화는 무한 동어반복처럼 보이고, 얼핏 우리네 60~80년대 <대한뉴(우)스>를 떠올리게도 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는 북한 기록영화를 학술적 해부대에 올려놓은 저작이 나왔다. 김승(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씨가 쓴 <북한 기록영화, 그 코드를 풀다>는 제목처럼 북한이 심혈을 기울여 생산해내고 있는 기록영화를 영상기호학적 관점에서 해석해낸 본격 연구서다.
“저자 김승은 북한 기록영화의 유일한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기초로 만들어진 이 책은 최초의 북한 기록영화 연구일 뿐 아니라 다양한 이론과 방법론을 적용해 북한 문화연구의 학문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저서라고 할 수 있다.”(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북한사회문화)
최고 권력의 부자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북한 기록영화 <백승을 떨쳐온 무적의 열병대오>(1985)에서 아버지 김일성은 탁월한 군사지략가로 재현되며(사진 위), 아들 김정일은 늘 인민군대와 함께하는 희세의 ‘선군영장’으로 묘사된다. 사진 한울 제공
북한은 정권 초기부터 기록영화에 주목해왔다. “기록영화는 직관적 선전사업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는 김일성의 언명에서 드러나듯 주민들에 대한 선전·선동 수단으로서다. 이 책이 분석 대상으로 삼은 1946년부터 2011년까지 북한 당국이 만들어낸 기록영화는 모두 1741편에 이른다. 한해 평균 26편꼴로 제작한 셈이다. 김씨는 이 가운데 시기별 대표작 4편을 추려 각각을 서사구조와 영상기호, 이데올로기 순으로 자세히 뜯어보았다. 정치사회적 콘텍스트(맥락)를 바탕에 깔고 텍스트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역순으로 접근한 것이다.
사회주의 건설기의 대표작 <38선>(1948)은 8개 시퀀스로 기(1)-승(3)-전(3)-결(1)의 관습적 문법을 따르면서도, 내용에선 처참한 남한-우월한 북한이란 ‘이항대립’ 구도를 극대화하고 있다. 물론 “찬란한 북조선”의 “도처에 금자탑을 쌓아올린” 것은 결국 “우리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 김일성 장군” 덕분이다. 1969년 작 <수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네>에선 한국전쟁과 갑산파, 남로당 계열 숙청 등 내부 권력투쟁을 거쳐 김일성 유일체제를 수립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투영돼 나타난다.
그로부터 16년 뒤, 이른바 조국해방 40주년, 당 창건 40주년의 해이던 1985년에 나온 <계승자들>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세습’이 정당하고 필연적인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김일성의 ‘은덕’은 일출을 4열 또는 8열로 퍼지게 찍어주는 ‘크로스 필터’를 통해 온누리를 따사롭게 비추는 존재로 은유되고, 곳곳에 등장하는 다양한 ‘깃발’은 ‘주체 혁명의 위업을 대를 이어 완성하자’는 이른바 ‘종자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정일 집권기에 제작된 <백승을 떨쳐온 무적의 열병대오>(2002)는 반일 인민유격대와 일제 백만관동군, 조선인민군과 미군, 인민군대와 미제 및 추종세력, 즉 ‘우리(선) 대 그들(악)’이라는 극명한 이항대립 구도를 통해 ‘선군정치’의 정당성과 체제수호의 절박함을 설파한다. 김일성광장의 열병식은 집단의 힘을 과시하는 몹숏(mob shot)으로 처리되고, 사열에 나선 최고 지도자의 모습은 나치 시대 문화영화의 히틀러처럼 모두 앙각(low angle)으로 포착돼 있다. “예술영화는 렌즈에 촬영 대상이 복종하지만, 기록영화에선 촬영 대상에 렌즈가 복종한다.”
나온 시기는 각기 다르지만, 이들 필름이 갖는 콘텍스트는 일관되고 분명하다. 서사구조는 수령을 중심으로 무장한 인민이 체제를 수호한다는, 그들 나름의 절대적 공공선을 추구하는 ‘의식의 동기화(synchronization)’에 맞춰져 있다. 최고 지도자를 멀리서 오랫동안 잡는 롱숏 위주의 롱테이크,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패닝, 대중보다 커 보이게 하려는 광각렌즈 활용, 조명과 삼각대를 이용한 의도적 연출, 동영상과 정지화면 그리고 조선화를 섞어넣은 극적 편집, 과장된 배경 음악 등은 ‘연상에 의한 숭배’를 목표로 한다.
“북한 기록영화에서는 매도하기(name-calling), 화려한 미사여구, 증언, 서민적 이미지 구사, 카드 속임수, 대세편승과 같은 선전기법을 사용한다. 이런 기법들은 캠페인이나 공익광고처럼 대중을 혁명의 주체로 반복 호명하여 (…) 기록영화에서 재현된 최고 지도자는 그 자체가 고유명사가 되며, 그를 중심으로 온 사회가 뭉쳐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 기록영화는 당 정책과 혼연일체가 되어 체제의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북한은 기록영화에도 ‘주체’라는 수식어를 붙여 독창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보면 볼수록 나치 시대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창조한 ‘문화영화’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 지은이의 결론이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