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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고은 시인, 현대사의 원혼들을 시로써 위무하다

등록 2016-09-29 19:52수정 2016-09-29 20:03


고은 시인이 3년 만에 신작 시집 <초혼>을 펴냈다. “구글 알파고에게 없는 것/ 그것이 나에게 있다// 슬픔 그리고 마음”이라고, 시집 맨앞에 실린 시 ‘최근’에서 썼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은 시인이 3년 만에 신작 시집 <초혼>을 펴냈다. “구글 알파고에게 없는 것/ 그것이 나에게 있다// 슬픔 그리고 마음”이라고, 시집 맨앞에 실린 시 ‘최근’에서 썼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초혼
고은 지음/창비·1만3000원

고은(83) 시인이 <무제 시편> 이후 3년 만에 새 시집 <초혼>을 묶어 냈다. 본문만 280쪽에 이르는, 시집 치고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무려 1000쪽이 넘었던 <무제 시편>에 비하면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소품’이다. 그렇지만 연치를 핑계로 시적 긴장을 늦추거나 손쉬운 원융과 화해로 물러나 앉지 않고 여전히 언어와 세계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모습은 감탄스럽다.

“늦었다/ 벼랑으로 솟구쳐/ 저놈의 비바람 속에 서야겠다/ 저놈의 눈보라 속 두 다리 부들부들 떨리는 썩은 분노로/ 기어이 기어이 달려가야겠다”(‘만년’ 부분)

“몇 번쯤은 천년의 성벽이 무너진 듯 극명할 것”이라는 다짐으로 시작하는 시 ‘만년’의 인용한 대목은 시인이 한창 사회·역사적 실천에 매진하던 1970, 80년대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극명’과 ‘분노’는 얼핏 팔십대 원로와는 어울리지 않는, 피 끓는 청춘의 언어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그러나’의 부정 정신을 견지하는 시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다.

“역사는 그칠 줄 모르는 폭력의 난무에 눈감았습니다/ 아니/ 역사는 자주 폭력의 실체였습니다/ 나의 피리 소리는/ 끝내 저주받았습니다/ 나의 노래는 끝내 추락하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는 기어이 불멸입니다”(‘‘그러나’의 노래’ 부분)

장편 굿시 포함한 신작시집 ‘초혼’
분노와 투쟁 다짐하는 선명한 시어
당대 시의 협소함과 치우침도 비판

60쪽이 넘는 장편 굿시 ‘초혼’(招魂)은 월명사와 소월의 후신(後身)을 자처하는 시인이 한국 현대사의 억울한 혼령들을 불러내어 한바탕 해원과 위무의 의식을 치르는 무당의 사설 형식을 취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로 시작하는 소월 시 ‘초혼’에 빗대어 시인은 관동지진과 제주 4·3, 지리산 빨치산, 낙동강과 백마고지 전투, 갑오농민전쟁과 을미의병, 80년 5월 광주와 세월호까지 한세기 남짓한 한국 현대사의 원혼들을 다독인다.

“나 소월의 초혼 신 내려/ 이 고려강토/ 이 고려산천 도처마다 떠돌며/ 신방울 울려/ 신북 치며/ 신피리 불며/ 내 비록 맺힌 소리나마/ 이 소리로 소리제사 소리공양 내내 올리며/ 이 땅의 반만년 원혼 혼령 위무하며/ 살아가고저”(‘초혼’ 부분)

이 시에서 시인은 “이현상 영가여/ 차일혁 신위여/ 이제 당신네들 앞장서 벗어나/ 이내 하늘길 함께하소서”라며 빨치산 대장과 그를 사살한 토벌대장의 혼령을 더불어 위무하지만, 광주 5·18 가해자들과 그 뿌리라 할 식민·매국 세력에 대한 고발과 단죄에 관한 한 서슬퍼런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하지 않는다. 역시 시인이 늙지 않았다는 증거다.

“아직 살아 있는 학살 도당 평생 지옥 팔한팔열지옥/ 만행도당 내생도 내내생도 피지옥 거기 처하라/ 이로부터 영가시여 열사 각위시여/ 광주항쟁 민주역사 이 정신을 주재하소서/ 이 소리 들으소서/ 이 소리 들어/ 이 나라 식민 잔재/ 이 나라 매국 실세/ 이들의 정신 깨어주소서/ 이들의 행악 고치소서”(‘초혼’ 부분)

시와 언어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언어는 이미 언어의 죄악인 것”(‘직유에 대하여’)이라는 선언은 물론 생각 없이 남발하는 상투적 비유를 경계하는 말이지만, 언어 자체의 타성과 구속에 대한 비판으로 새길 수도 있겠다. “이제 종이에 쓰지 않고 공중에서 씁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웁니다// 지워버린 시가 시입니다”(‘두레 주막에서’)라는 대목은 쓴 시와 쓰지 않은 시 사이의 경계마저 허물어 버리는 파격과 초탈을 과시하는 듯한데, 그에 이어지는 시의 마지막 한 줄은 또 다른 반전이다. “그런가요? 가버린 시가 시인가요? 아직 오지 않은 시가 시인가요?” 시인 자신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지 않는다. 독자들이 스스로 생각해 보라는 듯.

“그래서/ 고만고만한 골목길이나 뒷골목길에 가/ 너스레로 놀고 있는가// 그래서 제 구덩이에 푹 빠져/ 뛰쳐나올 줄 모르는가”(‘첫걸음’ 부분)

“시에는/ 새것 말고/ 진부한 것/ 함께 있어야 한다// 지금의 시에는/ 그것이 없다”(‘원숭이 앞에서’ 부분)

작고 내밀한 세계로 파고드는 시들을 겨냥한 ‘첫걸음’이나 새로움에 사로잡혀 지켜야 할 본분과 원칙을 방기하는 경향을 꼬집은 ‘원숭이 앞에서’에서는 동시대 시의 어떤 치우침에 대한 원로 시인의 은근한 질책이 짚인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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