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김의 미학
이남호 지음/현대문학·1만6800원
12간지가 다섯 바퀴 돌게 되면 찾아오는 나이 60. 다섯 바퀴를 한 생으로 쳐서 만 나이 예순을 환갑 또는 회갑이라 부른다.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출발선에 섰다는 뜻이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을 적의 이야기겠지만, 예순 이후의 삶은 여분이라는 뉘앙스가 담겼다.
문학평론가 이남호(사진)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가 회갑을 맞아 낸 새 책 제목을 ‘남김의 미학’으로 삼은 것은 그 점에서 그럴듯하다. “젊은 시절의 나는 철저함에 집착했고 세상도 그것을 강요했다”고 말하는 그가 회갑 나이에 깨달은 남김의 미학을 한국 고유의 문화 전통에서 찾은 이 책의 부제는 ‘한국적 지혜와 미학의 탐구’. 시조와 시조창, <춘향전> <임꺽정> <혼불> 같은 소설, 서정주와 박목월의 시 등 자신의 전공을 살린 분야뿐만 아니라 집과 음식, 정원, 그림, 그릇, 가구, 조각보, 왕릉 등 생활사와 미술사까지 영역을 넓혀 일관된 해석을 시도했다.
시조는 한국을 대표하는 정형시다. 그러나 정확히 17음절(5/7/5)에다 계절을 가리키는 낱말이 하나씩은 들어가야 하는 일본의 단시 하이쿠 또는 20자나 28자를 엄수해야 하는 데다 평측(음의 고저)과 운까지 지켜야 하는 한시 5언절구와 7언절구 등과 달리 시조의 형식 요건은 퍽 느슨하다. 3음장 12음보 43자가 시조의 기본 형식이긴 해도 종장의 첫 구 3자만 지켜주면 나머지는 한두 글자씩 많거나 적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런 평시조 말고 엇시조나 사설시조처럼 구속성이 훨씬 떨어지는 시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시조에 곡을 붙여 느리게 부르는 시조창은 종장의 마지막 구절은 아예 부르지 않고 노래를 끝내 버린다. “굳이 마지막까지 다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하다고 느껴지는 지점에서 나머지를 남겨두고 그만두는” 시조창의 멋과 여유는 한국적 ‘남김의 미학’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에서 보이는 서정주의 시세계, 그릇의 절반만 백토 물에 담가서 표면이 흰빛과 검은빛으로 반분되게 만든 데다 백토 물이 흘러내린 자국을 천연스레 내버려두어 파격과 변화의 미를 얻은 분청사기 분장무늬 사발, 거의 다듬어지지 않은 모과나무 줄기를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한 화엄사 구충암 요사채, 굵기도 길이도 제각각인 데다 휘기까지 한 목재를 기둥과 서까래로 쓴 선운사 만세루 등에서도 지은이는 ‘남김의 미학’의 사례를 찾아낸다.
최재봉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