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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로 번창하라

등록 2016-09-29 19:54수정 2016-09-29 20:08

주원규의 다독시대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
김원 지음/현실문화연구(2011)

오늘의 한국사회는 기묘한 망각의 시대를 걷고 있다. 망각이라 함은 시대가 요구하는 최소치의 공분에 대한 그 역시 최소한의 열정이나 의지마저 탈각시키는 강요의 한 특성을 뜻한다. 또한 그 망각이 기묘하다 함은 망각의 주체가 전형적으로 알려진 지배계급,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발화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망각의 시작이 소위 갑-을의 위계구조에서 을의 폐허에 방치된 또 다른 ‘을’로 자리매김한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에 의한 것이라는데 당혹스러움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 언급한 가난과 무식은 권력지향의 포식자들이 멋대로 규정해 놓은 ‘을’의 다른 이름이다.

안타깝게도 권력의 희생양들은 스스로 가난하고 무식하다고 여기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낳은 욕망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에게 지워진 가난과 무식의 짐을 독재 권력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을 향한 성토로 연결하지 않는다. 도리어 산발적 신음으로 산화되도록 유인된다. 독재의 포식자들은 이들의 산발적 신음을 가난하고 무식한 발작으로 치부하며 유령의 존재로 말소시키고자 한다. 독재의 향수에 제법 충실한 인종이 되길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 현상을 해부하듯 묘파해낸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은 이른바 진보 진영에서도 외면받고 망각되길 강요받은 서발턴(subaltern)에 대한 본격적 기록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서발턴은 눈에 보이는 어떤 계급으로도 환원되지 못하는 집단의 잉여로 이해된다. 또한 서발턴은 권력 투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억지로 내몰린, 어느 시대에도 이질적일 수밖에 없는 가변적 인식 대상으로 취급받아 왔다. 한국사회의 서발턴은 도시 빈민, 폭도, 소년원생, 기지촌 여성, 광신도, 간첩 지식인, 파독 간호사, 파독 광부 등으로 대표된다. 국가에 의해 충성을 강요받거나 버림받은 서발턴이 독재시대를 몸소 거쳐 오며 어떠한 분화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불을 보듯 훤하다. 민중사에서조차 철저히 배제된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으려 하는 유령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히 기억될 수밖에 없다. 권력이 강제한 현재진행형으로서의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은 망각의 유령이 되어 오늘의 한국사회를 떠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배회가 무의미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들의 외침과 오열이 도리어 기저의 신음으로 화하여 우리 두 귀에 똑똑히 들려온다는 역설 때문이다.

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과 그 죽음을 대하는 포식자들의 야만 앞에서 오늘의 한국사회는 한층 더 확실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이 번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만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진실이 포개어진다. 권력이 집어삼키려던 가난하고 무식한 자들은 더 이상 망각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외침은 시대의 야만에 당당히 맞서서 양심과 공분의 이름으로 번창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진실이 오늘의 우리를 버티게 하는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리라.

주원규 소설가

※칼럼 제목은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추천의 글’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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