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우북페스티벌의 북토크에서 페미니즘 SF를 토론중인 송경아, 정소연, 김보영 작가(왼쪽부터). 서울와우북페스티벌 제공
성별 없는 세상에서 권력은 누가 가질까? 여성 인구가 줄어들면 여성의 지위가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더욱 핍박 받게 될 것인가? 여성/남성을 가리기 힘든 기계인간 또는 우주인과 인류는 어떤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담고 있는 페미니즘 에스에프(SF) 소설들이 독자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에스에프(SF) 소설들은 인류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선보이며 ‘지금 세계’의 문제를 도발적으로 질문한다. 사회적 약자, 젠더 문제를 다루는 에스에프를 ‘변화와 진보의 문학’이라고 일컫는 까닭이다.
최근 발간된 페미니즘 에스에프 선집 <혁명하는 여자들>(조안나 러스 외 지음, 아작)의 옮긴이 신해경씨는 역자 후기에서 “전통적으로 에스에프 소설계는 여성에 적대적이었다”며 “1차 서프러제트(여성 참정권 운동가)가 일었을 때 반동이 일어난 곳이 에스에프 소설계였다”고 밝혔다. 여성혐오적 SF 작품들이 홍수를 이룬 뒤, 교육받고 능력있는 여성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에스에프 페미니즘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페미니즘 에스에프 소설은 1970년대 2차 페미니즘 물결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어슐러 르 귄을 비롯한 여성 에스에프 작가들은 에스에프를 ‘사고실험’이라고 한다. 에스에프는 현실을 질문하고, 공고한 질서에 균열을 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김보영·송경아·양원영·이서영·이현·정소연·듀나 등 여성이거나 성별을 불문에 붙인 작가들이 작품을 활발히 발표해온 가운데 에스에프 전문 출판사 아작, 에픽로그, 온우주 등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특히 최근 ‘여혐’ 논란은 페미니즘 에스에프 대중화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송경아 작가는 “영미권에서 에스에프 페미니즘 소설은 1960~70년대부터 흐름이 형성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2년 새 많은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출판사 에픽로그는 페미니즘적 중단편 ‘장르’ 소설을 공모해 최종 선정작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페미니즘 앤솔로지’ 행사를 벌인다.(모집기간 10월31일까지) 이 출판사 송한별 대표는 “페미니즘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지금은 누구나 페미니즘을 얘기하고 있고, 소설책을 만드는 입장에서 우리 나름의 목소리를 내야 할 필요성을 느껴 공모를 진행하게 됐다”고 밝혔다. 온라인서점 알라딘에서도 8월말부터 ‘여성 에스에프 작가 재조명 특별전’을 벌여 작가 코니 윌리스, 케이트 윌헬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옥타비아 버틀러 등의 작품을 소개중이다.
와우북페스티벌의 북토크 장면. 서울와우북페스티벌 제공
지난 3일 서울 와우북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북토크 ‘젠더 문제를 말하는 에스에프의 방식’은 페미니즘 에스에프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대기자들이 줄을 서서 강연을 들을 정도로 성황을 이뤄 100여명의 청중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는 여성과 생식, 인공지능, 소수자와 타자화의 문제 등을 다룬 국내외 에스에프 작가들과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테러리스트> 등을 쓴 송경아 작가는 사회자로 나서 “에스에프는 이상 세계를 상상하고, 차별을 극복한 사회를 그리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친화적인 문학”이라며 “마이너리티가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는 사조로서 페미니즘과 에스에프가 만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옆집의 영희 씨>(창비) 등을 쓴 정소연 작가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기적의책) 등을 쓴 김보영 작가가 이날 초대손님으로 참여했다. 김 작가는 “에스에프가 페미니즘을 얘기하는 것은 ‘본 적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 때문”이라며 “인류역사상 남녀평등을 이룬 적은 한번도 없었고, 세상에 없었던 방식을 그리는 에스에프에서 페미니즘은 화두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정 작가는 “나가기보다 머무는 경험이 많은 여성들이 (거리에) 나가보는 연습, 실험이 중요하고 그런 ‘사고 실험’으로서의 에스에프는 의미가 크다”라고 말했다.
작가들은 추천작으로 젠더 문제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어슐러 르 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옥타비아 버틀러 등의 작품을 권했다. 팁트리는 남자들이 멸종한 미래 지구에 도착한 남자 우주비행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휴스턴, 휴스턴, 들리는가?’(<체체파리의 비법> 수록작)에서 여성이 클론복제를 하는 사회를 등장시켜 남녀 권력과 사회적 위치의 변화를 다룬다. 버틀러의 <블러드차일드>를 추천한 정소연 작가는 “남성이 외계인을 임신하고 숙주가 되는 이야기인데, 굉장히 강렬하다”고 말했다.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은 인간이 신체적·감정적으로 양성의 특질을 모두 갖고 있는 사회에서 출산과 육아를 사회 전체가 공유하지만 유토피아가 결코 아닌 세상을 다룬다. 흑인 여성으로 ‘에스에프 역사상 가장 유니크한 작가’로 불리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 <킨>에선 100년의 시간을 타임슬립으로 오가는 흑인여성 다나가 인종, 노예제, 젠더와 권력, 감정의 문제를 넘나든다. 성별·인종이 고정된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의 만남을 그린 페미니즘 에스에프 작품들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회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며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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