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일 지음/창비·각 권 2만7000원 본격 여정의 시작은 2012년 6월13일, 포르투갈 리스본이다. 당시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은 78살이었다. 발길은 라틴 아메리카를 향했다. 리우데자네이루와 살바도르, 상파울루 등 브라질 대도시를 돌았다. 이구아수 폭포를 거쳐 남극으로 가는 관문인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를 찍고, 북단 멕시코와 쿠바까지 주요 항구와 도시를 훑었다. 돌아올 때는 미국 하와이를 거쳤다. 62일간의 강행군이었다. 2014년 나이 여든에 다시 한 번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콜럼버스의 대서양 횡단항해 현장 탐방이 목표였다. 18일 간 도미니카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와 콜럼버스의 2차항해 상륙지이자 첫 식민도시인 라이사벨라 등을 돌아본다. <문명의 보고 라틴아메리카를 가다>는 그 결과물이다. 정 소장은 문명교류학의 권위자다. 그의 실크로드 연구는 한국 학계에 특히 이슬람 세계와의 만남과 교류라는 새로운 지평을 펼쳐 보였다. 여러 저작을 통해 학제로는 문명교류, 지역으로는 서역과 중앙아시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킨 바 있다. 그가 노구를 이끌고 80일 간의 여행에 나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문명교류에 관한 자신의 지론인 ‘해상실크로드 환지구론’을 현장에서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썼다. 실크로드는 유럽과 아시아의 영역 안에서 이뤄진 동서 간의 문명 교류 통로다, 라는 것이 지금 학계의 지배적 담론이다.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늦어도 16세기 초부터는 바닷길을 통해 신·구 대륙 간 해로 개척과 문물교류가 이뤄졌다는 반론을 던진다. 아시아와 유럽, 유럽과 아메리카 사이 바닷길을 통해 전지구적 문명교류의 장거가 발현된 만큼, ‘실크로드’는 이제 유라시아의 국지성을 넘어 환지구적 교역 통로 일반을 일컫는 개념으로 격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소장은 이런 주장을 <실크로드 사전> <실크로드 도록> 등을 통해 구체화한 바 있다. 이걸 이역만리 라틴 아메리카에서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결과는? 그는 가는 곳마다 전지구적인 교역과 교류의 흔적을 찾아낸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후안암브로세티민속박물관에선 “짜릿짜릿한 전류가 일고… 흥분의 물결이 일렁”이는 순간을 맞았다. 옥수수·감자·고추·땅콩·담배 등 유라시아에 전파된 라틴 아메리카 특산물의 유물을 발견한 것이다. 20개 나라 51개 지역을 밟았는데, 찾은 유적지와 박물관이 284곳이다. 유럽이나 미국이 아닌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유적과 유산이 이렇게 통째로 소개되는 책을 만난 건 하나의 사건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듯하다. 여정이 온전히 학문적 주장의 딱딱한 입증에만 바쳐진 건 아니다. 낯선 풍광과 먹거리, 사람들에도 눈길을 보낸다. 브라질리아에선 와인에 레몬즙을 섞은 칵테일 카이피리냐 두잔으로 여독을 씻어내고, 거석 모아이로 유명한 이스터섬에선 날 생선을 숭덩 썰어 토마토와 양파, 식초로 버무린 ‘세비체’를 맛본다. 한국으로 치면 ‘세꼬시 회무침’일 텐데, 그는 “우리와 인디오 간의 문화적 공유성은 아닐는지”라며 또 사변을 펼친다. 체 게바라의 처형 장소, 트로츠키의 망명 거처, 쿠바의 헤밍웨이 가옥, 멕시코 벽화운동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 등을 찾아가는 여정도 흥미롭다. 사실 책읽기의 즐거움을 책임지는 건 이런 대목들이다. 10대 때 ‘김찬삼 여행기’를 탐독하며 밤새 가슴이 두근댔더랬다. 모처럼 다시금 낯선 세상 읽기에 흠뻑 빠져들게 한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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