쁠리도 괴리도 업시
성석제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성실한 집필 노동자’.
성석제(사진)의 새 소설집 <쁠리도 괴리도 업시>를 받아 들자 대뜸 떠오른 말이다. 시로 먼저 출발했던 성석제가 소설가로 ‘변신’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1995년 <문학동네>에 단편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를 발표하면서였다. 그로부터 20년 갓 넘는 시간 동안 그가 낸 책은 소설집과 장편, 산문집을 합해 20권이 훌쩍 넘는다. 한해 평균 한권을 상회하는 것.
<쁠리도 괴리도 업시>에 실린 여덟 단편은 성석제표 성실성의 또 다른 측면을 알려준다. 흔히 작가들에게는 좋게 말해서 고유한 세계 나쁘게 말하면 동어반복에 가까운 틀이 존재하게 마련이지만, 이 책의 수록작들은 서로 다른 빛깔과 모양을 지닌 꽃들처럼 각자의 개성을 한껏 뽐낸다.
표제작은 성석제의 첫 소설집에 실렸던 단편 ‘첫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첫사랑’이 중학생 소년이 동급생 남학생한테서 받은 낯설고 서투른 성적(性的) 관심과 사랑을 다루었다면, 이 작품에는 초등학교 시절 이후 중년 나이까지 평생을 얽혀 온 게이 친구가 등장한다. ‘대가 없이 퍼주기’ 유전자를 지닌 양 ‘나’에게 한없이 베풀기만 하던 ‘너’로 인해 ‘나’는 어느 날 밤 비몽사몽 간에 “내 인생에서 실제 경험한 최악의 황음(荒淫)”을 겪기도 하지만,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으면서 세월과 더불어 성숙해진 ‘나’는 이제 ‘너’의 다른 성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고려 가요 ‘청산별곡’에서 가져온 제목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아비뇽에서 자전거 여행을 하다 겪은 모험을 실감나게 그린 ‘사냥꾼의 지도’, 정신적 스승을 자처하며 혹세무민하는 인간과 그를 추종하는 이들을 신랄하게 꼬집은 ‘먼지의 시간’, 글쓰기 벽에 부닥친 작가 앞에 홀연 나타나 소설을 대필해 주는 이를 등장시킨 ‘블랙박스’, “하늘에서 떨어진 아기 선녀 같”은 여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가며 평생을 보낸 여주인공의 독백 형식으로 된 ‘골짜기의 백합’, 그리고 혹독한 고문을 거쳐 간첩으로 조작되는 바람에 삶을 망쳐 버린 인물의 쓰라린 이야기인 ‘매달리다’ 등이 두루 흥미롭다. 그런가 하면 음악과 글쓰기, 등산, 고스톱 등 온갖 분야의 숨은 고수들 이야기를 무협지 풍으로 엮은 ‘몰두’는 성석제가 시에서 소설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낸 책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의 기인들 이야기를 연상시켜 반갑다. 성석제의 첫 두 단편집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와 <조동관 약전>에서 작가가 가려 뽑은 단편 여덟을 묶은 책 <첫사랑>이 함께 나왔다.
글 최재봉 기자, 사진 류우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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