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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예의 바른 악수 뒤 손바닥에 남는 상처는 무엇?

등록 2016-10-20 20:16수정 2016-10-20 20:38

정이현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
노골적이지 않고 교묘한 가해 탐구
결혼과 육아 경험 바탕한 생활 감각
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문학과지성사·1만2000원

정이현이 깜찍하게 도발적인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등단한 것이 2002년이었다. 그 제목을 표제로 삼은 첫 소설집(2003)과 두번째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2007) 이후 그는 주로 장편에 집중해 왔다.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진 <달콤한 나의 도시>(2006), 알랭 드 보통과 함께 작업한 <사랑의 기초-연인들>(2102), 그리고 <너는 모른다>(2011)와 <안녕, 내 모든 것>(2013) 등이 그 장편들이다. 그러느라 단편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 실린 일곱 단편은 모두 2013년 이후 발표한 것들이다.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인 것만 같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

9년 만에 세번째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낸 소설가 정이현. “다른 것을 쓰고 있어도 단편을 못 쓰는 동안에는 불안하고 막막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9년 만에 세번째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낸 소설가 정이현. “다른 것을 쓰고 있어도 단편을 못 쓰는 동안에는 불안하고 막막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작가의 말’에 쓴 이 대목을 소설집 제목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소설집 안에 표제작에 해당하는 작품이 따로 없으니 말이다. 수록작들에서 상냥한 폭력의 사례들을 수집하기란 어려운 노릇이 아니다. 첫 작품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의 주인공은 아파트형 실버타운 직원. 30층이 넘는 건물에 직원용 엘리베이터가 단 한 개인 반면 입주자 전용 엘리베이터는 여섯대이지만, 직원은 입주자용 엘리베이터를 타서는 안된다. “입주자들과 마주치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본부장이 전체 회의에서 그것을 재차 강조했을 때 나는 불쾌감이란 단어를 혐오감으로 대체해보았다.” 여기 나오는 ‘혐오감’이 ‘상냥한 폭력’에 해당하지 않겠는가.

다음 작품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자. 주인공 지원의 고교생 딸 보미가 24주짜리 미숙아를 낳는다. 인큐베이터에서 보살핌을 받는 아이는 상태가 위중해서 시급히 필요한 수술을 해야 하지만, 지원은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다가 결국 아이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손바닥으로 가린 입술 사이에서는 무거운 장탄식도, 웃음도 새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길 위로 나섰다.”

원치 않는 미숙아 손주가 저절로 죽기를 바라며 방치하는 행위, 한 생명이 스러지는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인식구조. ‘상냥한 폭력’의 또 다른 사례일 것이다.

‘밤의 대관람차’의 주인공은 직장 동료들과 술자리에서 취할 정도로 마실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주량을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그에 대해 한 동료가 대꾸한다. “그건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별 열의도 없이 자신을 놀리는 동료를 보며 그는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일에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주 무시된다.” ‘상냥한 폭력’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지원은 소설 말미에서 “다시 길 위로 나”선다. ‘우리 안의 천사’ 말미에서도 주인공은 “바다 쪽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서랍 속의 집’에서도 마찬가지. 진은 새로 산 아파트의 현관문을 열고 “한 발을 마루 위로 올”린다. 의욕적인 새출발로 오해될 법한 마무리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게 중요하다. 진이 발을 들인 아파트인즉 먼저 살던 사람이 산을 이루다시피 쌓아두었던 쓰레기를 들어냈지만 여전히 악취가 진동하는 공간이다. 진은 그럼에도 “여기서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는데, “안도와 절망”(‘우리 안의 천사’)이 뒤섞인 복합적인 심리를 거기서 읽어낼 수 있겠다.

“집을 산다는 것은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인다는 뜻이었다. 부동산은, 신이든 정부든 절대 권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해낸 효과적인 장치가 분명했다. 돌이킬 수 없는 트랙에 들어서버렸다고 진은 실감했다.”

‘서랍 속의 집’의 주인공 부부가 대출금을 끼고 아파트를 장만하면서 곱씹는 상념이다. 정이현의 두번째 소설집과 세번째 소설집 사이에는 작가 자신의 결혼과 육아라는 신변의 변화도 있었다. 이번 책의 수록작들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생활’의 감각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그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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