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계산에 따른 공간 배치와 공정의 시간 배분은 정교한 표준화와 규격화로 유지되었다. 자리를 비우면 다음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돼 여성노동자들은 화장실에 가는 시간조차 제한받았다. 사진은 70년대 전자부품공장. 학민사 제공
공장과 신화
이영재 지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기획/학민사·1만9000원
“박정희 정권은 여성노동자를 ‘수동적 노동기계’로 만들고자 했다. (…) 여성노동자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불의와 정의를 구분하고, 빈인간적 처사에 분노하는 인격체가 되는 순간 그녀들은 여지없이 산업화를 저해하는 빨갱이로 호명되었다.”
1970년대 서울 영등포공단의 대일화학, 롯데제과,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이 벌인 노동민주화 운동이 책으로 묶여나왔다. <공장과 신화: 1970년대 영등포공단 대일·롯데·해태의 여성노동자 이야기>는 노동집약 산업구조 맨 밑바닥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 장시간 노동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지만 조금도 인정받지 못한 여성들의 역사를 되살렸다. 지은이 이영재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는 2007년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일할 때 70년대 노동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여성노동자들을 처음 만났다. 회사들은 이들의 해직시기조차 확인해주기 꺼렸지만 당사자들이 직접 발이 닳도록 동분서주해 사진과 자료를 찾고 사실관계를 입증해 노동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해직 인정 결정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2010년 국사편찬위원회 구술공모사업으로 2년여간의 50시간 인터뷰를 거쳐 빛을 볼 수 있었다.
7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노동민주화’
정부 ‘빨갱이’ 낙인…폭력 견디며 생존
“투사 설득 아니라 공감으로 움직였다”
10대 시절 지지리 못사는 시골에서 탈출해 서울로 왔지만, 여성노동자들이 터잡은 곳은 촌보다 더 사정이 나쁜 ‘닭장촌’(자취방)이었다. 도시빈민으로 살면서 하루 일과는 18~24시간 노동으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국가는 여성노동자들의 신체를 규율했고, 노동 시간을 표준화·규격화했다. 조장은 초단위로 시간을 재고, 여성노동자들은 기계 부품처럼 일했다. 화장실에 가지 못해 “오줌소태”를 겪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공장은 ‘반공의 전초 선전기지’가 되어 ‘새마을노래’를 의무적으로 틀었으며 ‘재건체조’ ‘신세계 체조’를 보급했다. ‘정신의 토착화, 유신의 토착화’(동양나일론) ‘우리는 단결하여 오직 유신에 의한 조국의 산업발전과 민족통일의 성업 완성에 기여한다’(미원) ‘새마을운동, 새생활실천, 업무유신’(한국전력) 같은 정신무장 표어가 주입됐다. “지겨워요”라고 여성노동자들은 회고했다. 공장은 안보교육의 장이었다.
1970년대 ‘공장새마을운동’ 당시 사진. ‘유신 공장’은 반공의 전초 선전기지로서 새마을노래를 의무적으로 틀며 재건체조를 보급했다. 학민사 제공
가발, 제과, 섬유 등 여성들이 주로 일하며 70년대 호황을 누린 산업, 그 ‘유신 공장’에는 도급제가 있었다. 도급제는 일의 양에 비례해 보수를 받는 청부노동으로, 말 그대로 사람을 쥐어 짜는 노동이었다. 동료를 감시하고, 경쟁상대로 만들어 통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여성노동자들은 이를 ‘총 없는 전쟁터’에 비유했다. 도급제로 하루에 1만5천~2만개의 사탕을 싸던 이들의 손가락은 지금까지도 휘어 있다.
책은 당시 대공장 노동자의 성별 위계도 함께 밝힌다. 롯데제과에서는 남자 경비원이 여성노동자들을 예비범죄자 취급하며 몸을 수색하는 ‘검신’을 했다. 당시 근로기준법으로도 위법이었지만, ‘여성 경비원이 검신해달라’고 건의하니 보복성 징계를 했다. 설 연휴를 앞두고 검신 줄이 길어지자, 고향에 가려 차표를 끊어놓은 반도상사 10대 후반 여성노동자는 새치기를 했다며 몽둥이로 머리를 맞아 뇌진탕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검신은 섬유·전자·완구·봉제 등 여성과 청소년노동자가 많은 사업장에서 더욱 심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자괴감과 분노를 느꼈고 비인간적 대우와 모멸감을 특히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음식에도 차별이 있어 24시간 연속으로 일한 여성노동자들에게 퉁퉁 불은 국수를 주었지만, 관리자들에겐 쌀밥, 떡갈비, 설렁탕 등을 따로 주었다고 한다. 깜빡 졸았다며 남성 대졸 관리직 사원에게 뺨을 맞거나 폭언, 폭행을 당하는 사례도 등장한다. 이런 부조리가 여성들을 노동민주화 운동으로 내몰았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들은 철의 규율로 단련되거나 투사에게 계급의식을 주입받아 움직인 게 아니라고 지은이는 풀이한다. 산업선교회, 크리스천 아카데미, 노동야학 등에서 노동현장의 분노와 공감대를 표출하고 모순 해결법을 찾았으며, 서로 처지를 공감하면서 연대했다는 것이다. 북돋워주고 챙겨주는 동지애, 자매애도 대오를 유지하는 동력이 되었다고 보았다.
공포분위기 속에 노조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1979년 7월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은 100명이 넘게 산업선교회관에 모여 8시간 노동제 찬반 논의를 진행했다. 다음달, 8시간 노동제를 공식적으로 요구하자 남자 기사들이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퇴근 때 현장 문을 잠그고 “돼지같은 년” “썅년” “병신” 등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을 했고, 철사를 뜨겁게 달궈 “너, 거기 가만 앉아있어”라고 말하며 위협했다. 한 여성노동자가 남자 기사들의 손에 끌려나와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며 실신했지만 한국노총 위원장은 텔레비전에 나와 “자해”라고 말했다.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은 어떤 언론도 다루지 않았고, 급기야 식품업계가 8시간 근무조건을 실시하게 되자 긍정적 평가만을 앞다투어 내놨다. 8시간 노동제 관철 뒤에도 이 운동에 앞장섰던 해태제과, 롯데제과 여성노동자들은 해고당했다. 산업선교회가 용공이라는 것을 밝혀내겠다는 무시무시한 압박수사도 진행됐다.
중앙정보부는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고, 문제있는 노동자로 지목되면 새마을운동 연수나 땅굴 견학을 보내며 안보교육으로 통제했다. 사진은 1979년 가나안 농군학교 노조간부교육.
‘판옵티콘’(원형감옥) 같은 구조 아래 18시간 노동을 8시간 노동으로 바꾼 이 투쟁에 대해 지은이는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8시간 노동제에 얽힌 그녀들의 피나는 투쟁과정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 “한강의 기적은 이제 산업화 세력의 가면이 아니라 한국 국민들의 고단한 노동사를 웅변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그 핵심 주체가 바로 수출주도 경제정책을 지탱하며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했던 대한민국의 10대 여성노동자들이라는 것이다.
책 말미에는 박정희 기념사업에 투입된 국가예산이 실려 있다. 최근 7년간 박정희 기념사업을 위해 책정된 예산은 1356억 5000만원, 새마을운동 지원예산은 올해 143억 2300만원이다. ‘박정희 시대의 주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동시에 그때 여성노동자들에게 국가가 해준 것이 무엇인지도 함께 밝힌다. ‘공순이’ ‘빨갱이 해직자’라는 주홍글씨, 그리고 40년 뒤 피해자들이 애면글면 증거를 모아 인정받은 민주화운동 관련자증서 달랑 한장이었다. 거기에 사과나 감사의 표현은 없었다고 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