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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젊은 예술가의 아픈 초상

등록 2016-10-27 19:29수정 2016-10-27 19:45

주원규의 다독시대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사계절(2016)

이따금 소설을 쓰고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된다. 오늘처럼 하수상한 세월이라면 더욱 그렇다. 소설이란 한없이 무료한 시간을 그 역시 무료하게 휘발시키는 잡동사니일 수 있다. 동시에 소설은 세계와 인류, 더 나아가 우리 실존과 관련된 혁명에 가까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소설 쓰기와 읽기는 그 직접적 효과는 불확실하지만 그만큼 매혹적인 폭발력을 가진 것이다. 쓰기를 추구하는 이, 읽기를 실천하는 이 모두에게 소설은 다른 볼거리가 넘쳐흐르는 오늘날에도 포기할 수 없는 도락의 하나로 버티고 있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작가의 경우 그 폭발적 지평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남다른 좌절과 그만큼의 고역으로 다가오는 것을 외면하기 어렵다. 더욱이 그 소설 쓰기가 인류의 시원, 그 중에서도 악의 맨 얼굴과 대좌하고픈 인류학적 야심에 뿌리를 두었다면 그 고역의 끝은 가히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청소년소설 ‘합체’란 작품으로 혜성같이 나타난 박지리 작가의 2016년 신작 <다윈 영의 악의 기원> 같은 작품은 위에서 밝힌 고역의 총합이다.

청소년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평가받는 <…악의 기원>은 그 분량부터가 압도적이다. 무려 850쪽, 원고지 환산 3천장에 육박하는 이 소설은 작가만의 오만할 정도로 촘촘히 구상된 가상 세계 속에서 한 인간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철저한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설의 배경은 국가의 핵심 권력을 가진 자들이 거주하는 안정적인 1지구부터 60년 전 발발한 12월 폭동으로 인해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땅 9지구까지 완벽하게 구획된 세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는 그곳 1지구에 거주하는 최고의 기숙학교인 프라임스쿨의 모범생인 주인공 다윈 영이 친구 루미의 삼촌이 살해당한 사건을 추적하면서 점차 거대해지는 과거의 내막을 파헤쳐 가는 과정으로 채워진다. 이 소설은 자신의 의지로는 탈주가 불가능한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 살인의 문제와 법의 효용성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또한 악으로 둘러싼 세계에서 돌연 솟구쳐 오르는 부자간의 사랑과 3대에 이어 내려오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수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하는 방대한 스토리텔링 위에 펼쳐놓은 뒤 독자들로 하여금 악의 본질을 사유하게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더 이상 박지리 작가 신작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아주 잠시만 황홀하고 꽤 오랜 시간 고통이었을 소설 쓰기에 울어야 했던 작가는 이 소설을 끝으로 소설 쓰기 노역장과 영원한 작별을 고했기 때문이다. 소설 쓰기의 삶이 이처럼 고되고 서글플 수밖에 없는 오늘의 현실이 이 무모할 정도로 찬란한 야심으로 가득한 작품을 배태시킨 작가에게 얼마나 큰 아픔으로 다가왔을까.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웠을까. 그렇기에 다만 약속할 뿐이다. 한 젊은 예술가의 이 지독히도 아픈 초상을 무관심의 자리에 놓아두지 않겠다고. 소설을 읽고 쓰는, 여전히 고고하게 타오르는 혁명적 인간다움을 꿈꾸는 모든 이들이 그를 기억하겠다는 약속 말이다. 아팠지만 그만큼 황홀했을 작가의 영면에 이 보잘것없는 한 토막의 글, 띄워 보낸다.

주원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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