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독서
김재성 지음/글항아리·3만2000원 길에 연결되지 않은 방, 방에 이르지 않는 길은 의미가 없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길을 목적지에 이르는 도구로만 여긴다. 그러나 본디 “길은 그 자체로 소통의 장이었고 만남과 축제”의 공간이었다. ‘길’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인문학적 상상력을 펼친 책이 나왔다. 국내 토목공학 전문가가 쓴 <미로, 길의 인문학>은 여러가지로 매력적이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풍부한 지식과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인간과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통찰에 가닿는다. 제목의 ‘미로’가 ‘아름다운 길(美路)’인 이유다. 지은이는 여섯 갈래의 길을 안내한다. 1부 ‘생각의 이음’에선 바벨의 도서관에서부터 유년의 숲길, 밤하늘 별길을 거쳐 미로를 거닌다. “고대의 미궁이 인간을 억압하고 권위를 상징한다면, 중세 이후의 미로 정원은 기꺼이 빠져들고 싶은 아름다운 공간”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길(2부), 그 “순례의 길 끝에서 만나는 건 신이 아니라 고행으로 순결해진 자신”이다. ‘떠도는 사람의 길’(3부)에선 고대 장삿길과 뭇 민족의 유랑길을 밟고, ‘미지의 세계를 잇는 길’(4부)에선 오디세이와 무역풍과 수로를 만난다. 사람이 만들어낸 길도 있다. 터널은 ‘길의 경계를 허물고’(5부), 다리는 ‘틈을 잇는다’(6부). 터널 이야기는 일본 근대문학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아득한 첫 문장으로 연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나라였다.” 터널로 이어지는 양쪽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미지의 세계다. 풍부한 컬러 사진과 지도, 도해들은 친절하고 즐거운 덤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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