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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영육이 찢기고 망가진 이들의 ‘먹이사슬’

등록 2016-11-10 19:15수정 2016-11-10 19:46

조수경 첫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
스릴 남기는 미완의 결말 인상적
“육체폭력보다 더 큰 건 사회적 폭력”
모두가 부서진
조수경 지음/문학과지성사·1만2000원

조수경의 첫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에는 여덟 단편이 묶였는데 표제작에 해당하는 작품은 따로 없다. 등단작 ‘젤리피시’에 보이는 “모두 분절된 신체 기구뿐”이라는 대목, 또는 미발표 단편 ‘마르첼리노, 마리안느’에 나오는 “여자의 몸은 부서지고, 찢기고, 으깨진 채 사방으로 흩어진 것이 분명했다”는 문장이 책 제목과 가깝다면 가까운 사례들이다. 그러나 딱히 이 두 작품만이 아니라 수록작 거의 모두가 영육이 찢기고 망가진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책 제목은 맞춤해 보인다.

“상처 입거나 결핍된 사람과 공간, 감정, 상태에 어쩐지 집중하게 돼요. 어려서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증이 있었어요. 울증일 때 안으로 쌓아 놓았다가 조증일 때 글로 쏟아내는 게 제 방식이지요.”

9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는 소설집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외모와 암울하고 절망적인 그의 소설 세계를 연결짓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수록작 중에서도 특히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젤리피시’는 이후 조수경의 소설 세계를 예고하듯 뒤틀리고 음습한 세계의 비밀을 주인공의 신체와 그가 거주하는 공간에 집약시켜 놓아 인상적이다.

“아이처럼 작은 몸에 달린 성숙한 여자의 젖가슴, 근육이 잘 발달된 짧은 팔,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붙어 있는 가늘고 휘어진 다리는 몸통을 중심으로 하나로 이어져 있으나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법했다.”

첫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을 낸 소설가 조수경. “내 책이 서점에서 다른 책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짠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첫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을 낸 소설가 조수경. “내 책이 서점에서 다른 책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짠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주인공의 일터인 성인용품점이 특정 신체 부위를 과장되게 본뜬 “온통 토막 난 몸뚱이”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의 가게이자 살림집이 있는 곳은 건물 2층이지만, 하반신 장애를 지닌 여성이 성인용품점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은밀하게 유사 성매매를 일삼는 그 공간은 아무래도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에 어울려 보인다. 그런 지하실의 극단적 형태를 ‘사슬’에서 볼 수 있다.

“창이 없어 낮과 밤을 알 수 없고, 창이 없어 공기가 흐르지 않는 이곳은 잃어버린 시간이 종유석처럼 매달려 있고, 고약한 냄새가 기름때처럼 눌어붙어 있습니다.”

‘사슬’의 무대인 이 지하실에는 사나운 개와 세 인간이 동서(同棲)한다. 그런데 상식과 달리 이들 사이 위계질서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이 아닌 개다. 짐승과 인간의 지위가 뒤바뀐 이 끔찍한 공간을 창조하고 지배하는 존재가 지하실 바깥의 먹이사슬에서 최하위 피식자에 해당하는 무력한 인간임을 알려주는 소설의 결말은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포식자와 피식자,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절대적이지 않고 서로가 물고 물리며 끝없는 생존 경쟁을 벌여야 하는 인간 사회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적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소설 소재를 다양하게 얻는 편인데, 신문 사회면 기사에서 얻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특히 끔찍한 사건 기사를 즐겨 읽습니다. <한겨레> 토요판에서 지존파 납치 생존자를 인터뷰한 특집 기사를 읽고 기자를 만나기도 했어요. 언젠가 소설로 쓰게 될 것 같아요.”

‘할로윈?런, 런, 런’은 오래 전 큰 사고가 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낡은 놀이동산에서 좀비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다. 바이킹의 추락을 두고 “배는 순식간에 추락해버렸어”라고 동료 알바 좀비가 말할 때, 최근 한국 사회의 가장 크고 끔찍한 사건이었던 세월호를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주인공은 꿈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남자친구에게 망치를 휘두르는 한편, 놀이동산에서는 생존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을 ‘사냥’한다. 소설 말미에서 남자친구로 의심되는 누군가의 진짜 칼에 찔린 그는 “(동이 틀)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하지만, 그 위로가 부질없다는 것을 독자는 알고 있다. 이 작품을 포함해, 불안과 초조의 느낌을 남긴 채 끝나는 미완의 결말은 조수경 소설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육체적 폭력은 오히려 하위의 폭력이고, 더 큰 폭력은 사회적 폭력”이라고 작가는 말했는데, 첫 소설집 <모두가 부서진>의 바탕에는 바로 그런 인식이 깔려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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