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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는 살아남았고, 더 안녕히 살아갈 것이다”

등록 2016-11-10 19:25수정 2016-11-10 19:31

가족 내 성폭력 실화 담은 ‘글그림책’
문학공감 스토리텔링 공모전 우수작
“작가·퀴어·출판인으로서 새 출발”

코끼리가면
노유다 지음/움직씨·1만3000원

“넌 내 얘길 안 듣잖아.”

원망 섞인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진다. <코끼리 가면>은 ‘가족 내 성폭력’ 생존자의 자전 소설이자 여성 퀴어(성소수자)의 삶을 다룬 그림책이다. 적나라하게 잔혹하고 슬프지만 힘 있고, 무엇보다 예술적이다. 소설의 이야기성을 강조한 ‘글그림책’(노블 그래픽)이라는 형식도 실험적인데, 201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공감 스토리텔링 공모전 우수상으로 뽑혀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 책을 직접 쓰고 그린 노유다(34) 작가와 그의 동성 반려자이면서 최근 독립출판사를 함께 설립한 나낮잠(38) 편집인을 9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도서출판 ‘움직씨’의 공동대표다.

‘노유다’ ‘나낮잠’이라는 이름은 실명이다. 몇년 전 성폭력 생존자 자조모임에서 이름을 바꾸는 법적 절차를 알게 돼 함께 개명했다. “남은 날들을 스스로 지은 이름으로 살고 싶었다”고 나 대표는 말했다. ‘움직씨’라는 생경한 출판사명은 ‘동사’를 가리키는 순우리말. “말글만 앞선 진보, ‘위선’을 경계하며 사회적 차별과 혐오에 맞서 움직이고 행동하는 출판사이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했다.

<코끼리 가면>은 노 작가의 데뷔작. 그는 대필 작가로 13년 동안 문장을 닦았고, 나 대표는 <보리국어사전> 편찬 참여를 비롯해 10여년에 걸쳐 출판 편집을 해왔다. 그 덕에 대형출판사 중심의 출판 구조에서 벗어나 여성, 소수자, 어린이의 이야기를 다루는 독립출판에 도전할 수 있었다. 도서출판 움직씨는 실사구시의 인문학 시리즈, 여성의 예술, 실제 꿈틀대며 살아있는 문학을 지향한다.

“출판사 창립작은 무엇으로 할까 많은 고민을 했죠. 세상의 그늘보다 여성과 퀴어 프라이드를 높이는 이야기를 먼저 낼까 고민했었지만, 여성의 삶을 감옥 안에 가두는 근원에 성폭력이 있고 여성-소수자의 삶에 교차점이 있어 의미있는 발화라 여겼습니다.” (노유다)

독립출판사 ‘움직씨'의 공동대표 나낮잠(왼쪽)·노유다씨. 일간지와의 대면 인터뷰는 처음이라며 다소 쑥쓰러워 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독립출판사 ‘움직씨'의 공동대표 나낮잠(왼쪽)·노유다씨. 일간지와의 대면 인터뷰는 처음이라며 다소 쑥쓰러워 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소설 속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친오빠들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는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거운 비밀에 병들고 지쳐 20년 만에 부모 앞에서 “추악한 범인들”을 지목했지만 오히려 침묵을 강요당한다. ‘가시나가 오빠 기죽이면 못쓴다’던 엄마는 딸을 협박하고 아들들의 허물을 덮느라 바빴다. 트라우마로 인한 양극성 장애(조울증)로 평생 병증을 관리해야 하는 사람은 가해자인 아들들이 아니라 딸이었음에도.

“10년 전 처음 단편으로 이 이야기를 썼을 당시엔 문단에서도 여성의 성폭력 피해 경험 쓰기를 터부시했어요. 작가 커리어에 딱지가 붙는다면서요. 반면에 나 대표는 제 글을 읽어본 뒤 좋다면서 구조와 상징 뒤에 숨기보다 네 삶을 더 드러내라며 적극 지지해줬죠.” (노유다)

문학이란 공통분모로 만나고 가까워져 함께 살게 된 두 사람은 이 이야기를 10년 동안 준비했다. 작품은 1980년대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가부장적 가족사이자 여성 퀴어 개인사가 녹아 있다. 성폭력 생존자로서 가족과는 엄청난 싸움을 치렀고, 책을 낼 만한 심리적 준비도 해야 했다. 엄청난 후유증을 무릅쓰고 작품을 벼르던 작가 옆에서 나 대표가 든든히 지원했다. 나 대표는 “(유다가) 그림을 배운 적이 없는데 잘 그렸죠? 이 장면은 수정 전에 더 환상적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서로 눈빛이 따뜻했다.

두 사람은 문예창작학과에서 시와 소설을 전공한 문학 동료다. 노 작가는 “그럴싸한 미문이나 참신한 문학적 구조가 과연 문학인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정당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왜 문학이 될 수 없는가 오래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학 판’은 새로 진입하려는 여성 작가들에게 좌절감을 안겼다. 진보를 자처하는 남성 선배 작가, 출판인들 가운데는 ‘여성 작가는 문학계의 창녀가 돼야 한다’거나 ‘내가 등단 심사 과정에 힘써줄 수 있다’고 믿을 수 없는 제안을 은밀히 해오는 이도 있었다. 등단을 준비하던 두 사람은 문단의 남성 권력과 폭력을 절절하게 느꼈다고 했다. 여성 작가와 편집인 중심의 출판 구조를 고민한 까닭이다. “그딴 문학이라면 하지 않겠다 싶으면서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목소리가 마음 속에 차서 펜을 놓을 수 없었어요. 공들여 글을 읽어주고 책 내는 회사가 있다면 여성 작가들이 글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테고, ‘유리천장’ 문단과 남성 문인의 성적 요구에서 벗어나 외곽으로 밀려나더라도 정당하게 에너지를 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노유다)

창립작 크라우드 펀딩을 할 때 마침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벌어진 ‘#문단_내_성폭력’ 말하기 운동, ‘#가족_내_성폭력’ 말하기 운동에서도 기운을 얻었다. 후원으로 제작비 일부와 소박한 창립 선물도 마련할 수 있었다. “아프고 찌그러졌어도, 당장은 ‘코끼리 가면’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의미를 던지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두 사람은 한목소리였다.

책 곳곳에 등장하는 코끼리는 고통에 맞서 상처를 기억하고 증언하는, 역설적인 피해생존자의 강함을 상징한다. 코끼리는 70년이 지나도 물웅덩이를 찾을 만큼 기억력이 좋고, 할머니가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 ‘코끼리 가면’은 코끼리의 본성을 가리는 장막인 셈이다.

“할머니가 되는 날까지 코끼리로 살아가고 싶어요. 지혜로워지고 현명해져서 길 잃은 어린 코끼리에게 이 길로 가면 풀과 웅덩이가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이고 싶죠. ‘가면’은 평생 가져가야 할 흔적이겠지만, 다행히도 책을 쓰면서 많이 내려놓았어요.”(노유다)

사회 주류의 굳건한 ‘남성 동맹’에 맞선 이들에게 움직씨가 보내는 최고의 응원이자 복수는 아마도 책의 마지막 문장일 성싶다. “우리는 살아남았고 앞으로 더 안녕히 살아갈 것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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