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수 클리볼드 지음, 홍한별 옮김, 반비, 2016
인생은 인생 나름의 계획이 있다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나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는 성폭력이었고, 지금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배신이나 죽음)이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지은이는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이다.
학교 총기 난사의 전범이 된 사건. 1999년 4월20일, 에릭 해리스(18세)와 딜런 클리볼드(17세)는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미국 콜로라도주 소재 콜럼바인 고등학교에 들어가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살해하고 24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했다.
저자는 가해자이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딜런의 엄마다. 이후 16년. 그녀는 어떻게 살았을까. 나처럼 생각한 이들이 많았는지, 첫 페이지부터 다음과 같은 문장이 독자를 맞는다. “정말로 나는 고통 너와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하나- 내 불, 내 침대를 같이- 아, 끔찍하게도- 머리를 같이 쓰며?- 게다가 내가 먹으면 너까지 먹이면서?” 딜런은 전형적인 중산층 가족, “어렸을 적부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때 기분이 좋았다”는 선한 엄마와 아들과 대화를 좋아하는 아빠 밑에서 말썽 없이 자랐다.
친구들과 이 책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울, 자살, 악, 폭력, 이해, 고통 등의 단어가 나왔다. 나는 두 가지에 사로잡혔다. 타인, 그중에서도 자녀를 이해한다는 문제와 ‘저자’라는 이슈였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내 인생의 책”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저자”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대개 사람들은 글쓰기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글 쓸 자격, 자질”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나는 평소에도 그 부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인간의 글쓰기가 가능한 극한의 상황은 어디까지일까. 딜런의 엄마와 같은 상황에서도 글을 쓸 수 있다면, 인간은 재정의되어야 할 존재다.
대개 유서는 자살의 증거처럼 여겨지지만 유서를 남기는 이는 드물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기운이 없어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망각 외에, 글을 쓰는 방법(직면)으로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인류는 프리모 레비를 두고 이런 ‘야비한’ 실험을 했다. 나는 여러 남성이 한 여성을 윤간하면서 피해자의 갓난아이가 울어대자 시끄럽다며 아기를 죽인 가해자들과 일주일간 생활한 여성을 알고 있다. 글? 그녀는 자살했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사건의 원인과 이후 딜런 엄마의 삶을 파악할 수는 없다. 카드 동결, 비밀 장례, 수사, 재판, 자기 아들이 죽인 희생자 가족에게 편지 쓰기, 상담, 아이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묘사다. 미국은 13분에 한 명꼴, 매년 4만명이 자살로 사망한다(256쪽). 아들 딜런이 우울증과 자살 욕구를 앓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그녀는 지금 자살 예방 활동가로 살고 있다.
“내(가해자 엄마) 사죄만은 거절하는 세상에서”, 그녀 역시 자살을 생각했지만 죄책감으로 죽지 못했다.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죄의식은 물론이고 보다 본질적인 죄책감은 아이에 대한 이해, 궁금증이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내가 아이의 무엇을 놓쳤을까, 아이가 내게 고통을 말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왜, 대체 왜 딜런은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이해. 좋은 말이다. 그러나 타인을 이해하려는 순간, 트라우마가 시작된다. 더구나 ‘악’은 원래 이해 불가능한 인간사다. 이해(理解)는 밑에 서야 보인다(under/stand). 아주 밑에서. 그러나 ‘악’의 일부인 인간은 ‘악’ 위에서 잘난 체하며, 그것을 물리치려고 한다. 당연히 “숭고한 실패”(박찬욱 감독)다.
이 책은 해설(앤드루 솔로몬!), 추천사,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까지 모두 명문이다. “내 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독후감은 가장 곤란한 읽기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성찰하는 독서가 되기를 바란다.”(조한혜정)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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