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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나의 어머니는 한낱 기계였다

등록 2005-11-03 21:04수정 2005-11-04 15:56

1999년생<br>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차경아 옮김. 경독 펴냄. 8700원
1999년생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차경아 옮김. 경독 펴냄. 8700원
한 독일 청소년의 출생비밀 추적 과정을 통해 벗겨내는
생명과학의 암울한 미래 섬뜩하게 그려낸 ‘팩션’
소설 주인공인 17살 카알 마이베르크의 별명은 ‘차가운 카알’이다. 별명은 몹시도 암시적이다. 출생 직후 입양돼 자란 그에게 ‘유전적 부모’와 ‘사회적 부모’ 외에 대리모가 따로 있었으며, 그 대리모가 인공자궁 기계였음을 알게 됐을 때 카알의 ‘차가움’은 더이상 별명의 의미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16년의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삼아 한 독일 청소년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추적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 <1999년생>(경독 펴냄)은 생명의료기술과 생식산업이 만들어낼지도 모를 미래상을 그 기술이 창조해낸 한 개인의 실존적 시각으로 보여준다. 사실(팩트)과 허구(픽션)를 섞은 ‘팩션’의 형식을 지닌 이 소설의 지은이 샤를로테 케르너(55)는 소설 안에서 감상과 윤리를 뒤로 밀쳐내고 사실과 과학을 허구의 이야기 안에 적절히 버무려 넣었다. 그래서 미래 소설이되 단순한 공상과학 소설은 아니다.

이야기는 17년 동안 감춰졌던 비밀을 주인공들이 하나둘씩 벗겨나가는 ‘추적’의 형식으로 펼쳐진다. 거의 눈물을 흘린 적이 없고 잘 웃지도 않는 ‘차가운 카알’이 친부모를 찾다가 시청에 보관된 자기 개인정보 서류의 친부모 칸에서 ‘익명. SGR 1999’라는 기록을 보게 되고, 여기부터 소설의 모든 사건들은 시작된다. 거기엔 ‘특별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정보접근 금지 딱지가 붙어 있었다.

중년의 여성 신문기자인 프란치스카 데멜이 카알의 뿌리 찾기를 돕고 나섰다. 또 유전자인권단체 활동가인 생물학자 다크마르 브룬즈가 이에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급속한 속도로 진행돼 새로운 사실들을 속속 드러낸다.

하나둘씩 장막이 걷히고 드러나는 비밀의 실체는 카알에게 정체성의 혼란과 공포감을 더해주었다. 그는 체외수정 아기였다. 마침내 찾아낸 유전적 부모, 그러니까 학비가 없어 정자를 판 24살 의학도와 연구용으로 난자를 과학자한테 기증한 32살 불임 여자의 신원을 확인하고서도 그의 정체성 찾기는 끝나지 않았다. 카알을 아홉달 동안 품었던 대리모는 혼란스런 카알의 정체성이 안착할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추적자들이 찾아낸 진실의 종착점? 그것은 뜻밖에도 1999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 생식 실험실에서 비밀스럽게 개발된 인공자궁 기계 ‘1 KG/AU’였다. “그것은 받침대에 걸려 있는 플라스틱 자궁, 부화 용기, 또는 인공 자궁이라고도 이름 붙여진 그런 것이었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카알이 유리벽 너머로 바라봤던 어머니의 모습은 마지막 장면에서 유리벽 너머에 놓인 차가운 인공자궁을 바라보며 ‘나의 어머니는 한낱 기계였다’라고 외치는 카알의 절규와 극적으로 만난다.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관점을 그들의 육성을 통해 보여준다. 먼저 카알이 프란치스카에 건넨 일기장은 청소년기에 자신의 엄청난 출생 비밀을 알게 되며 겪게 되는 카알의 정체성 혼란과 공포를 전한다. 실험실의 유리관과 냉동실에 보관된 그의 원초적 근원, 곧 정자·난자와 배아에 대한 카알의 상상은 섬뜩하다. 또 최초의 체외임신 인간 카알의 이야기를 취재해 기획기사를 써나가는 프란치스카는 기사와 인터뷰 녹취록을 통해 카알을 바라보는 두 입양부모와 여자친구 사라, 그리고 인공자궁 개발자 발트 교수의 불임의 고통, 카알에 대한 사랑, 개발자의 기대 등을 그대로 전한다.

이 책에서 대리모, 난자 거래, 유전자 조작, 생명복제 등에 대한 생명윤리의 논란은 직접 다뤄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첨단기술의 도움을 받아 태어난 한 인간의 자아발견 이야기는 생식과학이 인간의 실존 차원에선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소설의 비관적 미래를 다 받아들일 순 없지만 ‘인간을 위한 생명과학’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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