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나온 <이연주 시전집>은 애초에 이연주(1953~1992)의 절판된 두 시집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1991)과 <속죄양, 유다>(1993)의 합본 및 복간 형태를 염두에 두고 출간을 추진했다. 그러나 출판사 최측의농간이 작고한 시인의 저작권자를 찾는 과정에서 기존 두 시집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 수십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생전에 시인이 활동했던 풀밭 동인의 동인지에만 발표하고 시집으로는 묶지 않았던 시 24편에 시극 한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이연주 시전집>은 절판된 책을 다시 펴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미출간 시들까지 포함함으로써 자칫 묻힐 뻔한 시인의 시 세계 전모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출판계 재출간 바람
출판계에 재출간 바람이 불고 있다. 재출간이란 오래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을 출판사를 옮겨 다시 펴내는 방식. 시간이 흘러도 의미와 가치를 잃지 않은 책들을 절판이라는 무덤에서 되살려내는 일이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현재 85권까지 나온 ‘문학동네 시인선’ 시리즈 이전에 나왔던 자사의 시집들과 세계사·열림원·민음사 등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가 절판된 시집들을 아우르는 복간 시집 시리즈를 기획해 12월 중에 1차분 5~10권을 낼 계획이다. 안도현의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과 함민복의 첫 시집 <우울씨의 일일>, 지금은 소설가로 활동하는 성석제의 첫 시집 <검은 암소의 천국> 등이 1차분에 포함되었다. 김민정 문학동네 시인선 총괄부장은 “시를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요즘 나오는 시집들만 텍스트로 삼을 뿐 저희 또래가 문학 공부를 할 때 큰 영향을 받았던 선배 시인들의 시집을 읽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문학동네에 앞서 문학과지성사 역시 절판 시집을 다시 내는 ‘문지시인선 R’ 시리즈를 기획해 <나는 너다>(황지우) <무림일기>(유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김경주) 등 10권을 내놓았다. 문지는 내년 초에 <분명한 사건>(오규원) <어느 별의 지옥>(김혜순) <황색 예수전>(김정환)을 이 시리즈로 펴낼 예정이다. 민음사는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싣는 참신한 기획으로 호평을 얻었던 ‘세계시인선’을 출판사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다시 내기로 하고 지난 5월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을 비롯한 1차분 15권을 내놓았다. 1973년 첫 출간과 1994년 2차 개정판에 이어 3차 개정판에 해당하는 이번 기획은 아폴리네르 시집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황현산 옮김)까지 17권이 나왔다. 양희정 민음사 편집부장은 “내년까지 50권을 낼 계획이며 시장 반응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꼭 100권을 넘기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소설과 인문사회과학 쪽도
문학 도서 재출간은 시집만이 아니라 소설 쪽에서도 꾸준히 이어진다. 책세상 출판사는 주로 1970, 80년대에 나온 중견 작가들의 첫 소설집을 다시 펴내는 ‘소설 르네상스’ 시리즈를 기획해 <무너진 극장>(박태순) <선생과 황태자>(송영) <사월의 끝>(한수산) 등 28권을 내놓은 바 있다. 민음사는 1998년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와 50만부 넘게 팔린 이문열의 대하소설 <변경>(전 12권)을 2014년에 펴낸 데 이어, 2001년 아침나라 출판사에서 나왔다가 절판된 ‘이문열 중단편전집’(전 6권) 역시 올 3월에 다시 내놓았다. 1988년 실천문학사에서 1부 전 5권이 출간되었던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소설 <화산도>는 지난해 10월 보고사에서 새 번역으로 전 12권이 완간되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양질의 번역서를 중심으로 재출간 흐름이 이어진다. 앙드레 모루아의 고전 <프랑스사>는 1980년대 홍성사와 기린원 등에서 잇따라 나왔다가 절판되었던 것을 지난 6월 김영사에서 재출간했다.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다가 절판된 미셸 보의 <자본주의의 역사>는 지난해 뿌리와이파리에서 다시 나왔다. 이밖에도 <거대한 전환>(칼 폴라니) <나의 인생>(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책과 혁명>(로버트 단턴) <세기말 빈>(칼 쇼르스케) <돈의 철학>(게오르그 지멜) 등이 새 옷을 입고 다시 나온 ‘현대의 고전’들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된 공동체>,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역시 재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인문사회과학 도서 재출간과 관련해 이승우 도서출판 길 기획실장은 “출판계의 불황 때문에 인문 및 학술서는 초판을 1000부 또는 500부만 찍고 마는 경우가 많고, 1년여에 걸쳐 초판이 모두 팔린다 해도 최소 500부는 돼야 하는 2쇄를 더 찍기가 어려운 게 현실인 만큼 그렇게 절판된 책들을 중소 규모 출판사들이 다시 펴내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특히 1970, 80년대에 영어나 일본어 중역으로 나왔던 ‘고전급’ 외서들을 해당 언어에서 직역해 재출간하는 일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권우 도서평론가도 “출판 불황기에는 어느 정도 질이 보장된 구간 양서를 다시 펴내고자 하는 유혹을 출판사들이 뿌리치기 힘들다”며 “그렇지만 저작권 계약이 끝난 뒤 계약을 자동 연장하는 대신 저작권료를 크게 높이고 출판사를 바꿔 다시 낸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사례에서 보듯 과도한 선인세를 지출하게 되는 문제가 없지 않다”고 지적했다.
재출간 전문 출판사도 나와
재출간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8월 출판 등록을 하고 10월에 첫 책을 낸 출판사 최측의농간, 진주의 서점 진주문고가 낸 출판사 펄북스, 그리고 박노해 시인의 시집과 산문집, 건축가 승효상의 첫 책 <빈자의 미학> 등을 다시 낸 느린걸음 등이 대표적이다. 신동혁 최측의농간 대표는 “처음부터 재출간 전문 출판사를 목표로 시작했다”며 “출판 등록 전에 300권 재출간 도서 목록을 확보했고 실제로 출판을 하면서 이 목록은 점점 더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 박남준 신작 시집 <중독>을 첫 책으로 내놓은 펄북스는 그 뒤 <백년 부부>(지아오보) <산남수북>(한샤오궁) <공자전>(시라카와 시즈카) <시즈코 상>(사노 요코) 등 절판 도서 4종을 되살려냈다. 여태훈 펄북스 대표는 “30년 정도 서점을 하다 보니, 분명 찾는 독자가 있는데 출판사에서 다시 내지 않는 책들이 눈에 보이더라. 내가 만약 출판을 하게 된다면 꼭 복간해야겠다고 생각한 책 목록을 가지고 출판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는 “출간된 지 몇년 지나지도 않아 아깝게 묻혀 버리는 책이 많은 상황에서 가치 있는 책을 다시 살려내는 일은 긍정적”이라며 “다만 상업적으로 이미 검증된 책만 좇거나 새로운 기획이나 필자 발굴을 포기하고 재출간에만 매달려서는 곤란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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