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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리셋’과 ‘정상’에 숨은 욕망

등록 2016-12-01 19:35수정 2016-12-01 20:16

사회학자 김영선·엄기호 새책
“싹 다 망해라” 희망 없는 리셋
‘정상 인간’ 규정하는 권력 분석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며 저항한 러다이트 운동은 1811년 가을 영국 노팅엄셔, 1812년 초 요크셔에서 잇따라 발생했다. 군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오월의봄 제공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며 저항한 러다이트 운동은 1811년 가을 영국 노팅엄셔, 1812년 초 요크셔에서 잇따라 발생했다. 군대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오월의봄 제공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창비·1만3800원

정상인간 -시대의 인간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김영선 지음/오월의봄·1만6000원


‘이것이 나라인가’ ‘이게 사는 건가’. 세월호 이후 터져나온 질문은 무거웠다. ‘○○사회’ 분석서를 출간했던 ‘파워라이터’들이 먼저 답변을 내놓기 시작한 듯하다. <단속사회>(2014) 이후 2년 만에 문화학자 엄기호는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를, <과로 사회>(2013)의 지은이 사회학자 김영선은 <정상인간>을 들고 돌아왔다.

정의? 필요 없고 그냥 ‘리셋’

“싸그리 망해버려라”. 젊은이들 말로 하자면 “리셋”이다. <…리셋…>을 쓰려고 연구하면서 지은이 엄기호는 남녀노소, 전국 어디서나 이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한다. 특권층은 “해쳐먹고”, 대중은 “더 비참해지고 파괴될 거”라고들 했다. 이들은 재건이나 변혁이 아니라 ‘리셋’을 요구하더라는 것이다.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울증”을 번갈아 겪으며 왜 사람들이 역사에 절망하고, ‘리셋’을 갈망하게 되었는지 책은 추적한다.

“민주주의가 이 정도 되면 후퇴는 불가능하다고 믿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사실 민주주의는 후퇴했다.” 사람들은 기득권을 증오하면서 동시에 약자를 공격한다. 이들은 진보적이면서도 반동적이다. ‘나’의 실패는 남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혐오하고 원한을 가진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적극적 조치들이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정의로운 조치가 아니라 불공정한 특혜라고 생각한다. 이들이 바라는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닌 ‘공정한 사회’다.”

적어도 나라가 최소한의 안전만큼은 지켜주리라는 기대도 못한다. ‘국가’는 재난의 바깥에서만 지나치게 잘 굴러갔다. 세월호 사태를 봐도 그렇다. 진도 바깥에서 국가는 유언비어 통제, 추모행진 중 민주노총 간부 구속,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단속, 추모현수막 강제철거까지 삽시간에 해치웠다.

말은 지켜지지 않았고, 글도 마찬가지였다. 지배계급은 “말과 글의 힘을 박살”냈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이 공론장을 파괴했고 “말이 똥값” “방귀만도 못한 것”이 되었다. “정치혐오의 정치”가 작동하면서 말과 글로 세상에 개입하려는 지식인도 ‘씹선비’ ‘설명충’ ‘입진보’로 전락했다.

사람들이 무기력, 불신, 혐오, 증오, 원한을 한방에 뒤집으려 생각하는 것이 ‘복수’다. ‘리셋’이다. 지은이는 “혁명과 달리 리셋은 불신의 산물”이라 말한다. 희망을 포기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에 지은이는 “고도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존엄, 안전을 요구하고 “활동과 의견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를 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상은 누가 왜 어떻게 만드는가

<정상 인간>을 지은 김영선은 사회학자로, 시간의 정치와 문화에 대해 줄곧 연구를 해왔다. <과로사회>는 장시간 노동하면서 자유가 없는 ‘돼지우리’에서 사는 ‘우리’의 문제를 다루었다. 장시간노동은 탈정치화, 보수화, 소비중독, 반환경적 삶을 부른다.

<정상 인간>으로 다시 한번 시간과 관리의 문제를 파헤친 사회학자 김영선.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정상 인간>으로 다시 한번 시간과 관리의 문제를 파헤친 사회학자 김영선.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정상 인간’의 역사적 변화를 다룬 이번 책에서 지은이는 또 한번 시간 관리를 따지고 들어간다. 특정한 인간형 만들기 프로젝트는 시간(여가)의 사용, 품행 개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 시기를 보면, 한국의 1970년대에는 새로운 특정의 인간형이 탄생했다. 산업전사, 조국근대화의 기수, 모범 근로자, 새마을 지도자, 새마을 아가씨 등이다. 여가 시간에는 금지곡을 듣지 못했고, 장발과 미니스커트도 금지됐다.

근대 서구 사회의 놀이·여가문화는 동물을 피터지도록 싸우게 하거나 사람이 다칠 수 있는 ‘유혈 스포츠’에서 점점 유순한 쪽으로 바뀌었다. 합리적 오락, 신사적 스포츠, 교양있는 레저가 발달했다. 대중여가는 특정한 품행을 강제하고 특정한 기질을 뿌리뽑는 장치가 되었다. 노동자의 몸은 기계처럼 분해·수리·교체 가능한 계량화의 대상이 되었다. “쉬는 방식도 내용도 산업 질서에 부합하는 것들로 채워졌다.”

어쩌면 이 책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일 수도 있는 건, ‘매너’에 대한 설명이다. 충동이나 강한 감정 분출을 자제하는 ‘애티튜드’는 근대 사회 들어서 생겼다. 1830년대 중반 가난한 노동자들이 벌인 ‘차티스트운동’에서 보인 횃불 무리, 거리행진은 중간계급에게 공포를 주었다.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도 불순하긴 마찬가지. 중간계급 사회개혁가들은 노동자들을 정치 집회에서 떼어내고 교양 시민의 덕목을 갖추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근대 이후 공공장소에서의 음주, 과도한 흥분과 폭력은 삼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의 지은이 엄기호.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의 지은이 엄기호.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왕의 머리를 잘라버리고

두권의 책은 최근 국정농단과 ‘촛불’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관련된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리셋…>의 에필로그에서 지은이는 지금의 ‘촛불’이 “리셋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차라리 왕의 머리를 잘라버림으로써 왕의 부재 이후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다.” 이렇게 실천하려면 우리 모두는 모든 곳에서 ‘동료 시민’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는 협력과 존엄에 달려있다고 그는 본다. 예컨대 여성, 청소년, 장애인, 성소수자가 연설하고 광장에서 모두가 박수를 치는 행위 자체는 ‘서약’이다. “존엄은 옆에 선 이를 ‘점’이 아닌 동등한 목소리이자 얼굴로 기억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광장은 민주주의가 실패한 곳인 동시에, 왕의 목을 치고 동료 시민이 서로 만나는 곳이 된다.

김영선의 <정상 인간>을 보면, 전과 달리 과도한 흥분을 자제하고 길거리를 청소한 뒤 귀가하는 ‘촛불’이 어쩌면 품행 바른 신체와 적절한 시간관리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지은이는 전화통화에서 “박근혜 정권은 초기부터 4대악·4대중독 척결 등을 내세우며 도덕주의와 ‘질서’를 강조했는데 그 프레임이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스스로 도덕적 기준에 맞춰 억제하도록 하는 행동양식, 일상 규율은 행동 뿐아니라 감정도 아우른다”고 말했다. 도덕과 질서의 논리가 촛불집회에도 투영되며 언론에 의해 반복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조화하는 장치들을 밝히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질문하는 일, 그 속의 권력 작용을 드러내는 것이 정치활동의 시작이다. 피로에 시달리지 않고 촛불을 들며 정치에 참여할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물론 그 자체가 정치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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