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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자가 싸울 때 얻는 것, 자유!

등록 2016-12-08 19:39수정 2016-12-08 19:50

육체적·정신적 ‘자기방어’
가사노동과 여성 노동 문제
노년 좌우하는 계층과 젠더

미녀, 야수에 맞서다
엘렌 스노틀랜드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사회평론·1만6000원

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동양북스·1만7500원

나이듦을 배우다
마거릿 크룩섕크 지음, 이경미 옮김/동녘·2만3000원

폭력, 가사노동, 노화의 공통점은 어쩌면 ‘싸움’에 있다. 성폭행이나 가정폭력에 맞서 싸울 때, 여성이 가사노동을 전담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와 싸울 때, 여성 노인은 공적 자금을 좀먹는 쭈글한 심인성 질병 환자라는 통념과 싸울 때라야 불평등한 사회적 조건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을 독려하는 책들이 한꺼번에 나왔다.

어머니, 자매, 그리고 전사

“우리는 자애로운 어머니, 헌신적인 자매 그리고 사나운 전사의 면모를 가지게 될 것이다.” 미국의 비정부기구(NGO) 활동가이면서 작가, 변호사, 프로듀서이기도 한 엘렌 스노틀랜드의 말이다. 그는 20년 전, 자기방어 기술을 가르치며 <미녀, 야수에 맞서다>(Beauty Bites Beast)를 썼다.

책은 조용하게 잠자는 ‘미녀’를 흔들어 깨운다.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폭력에 맞서는 ‘자기 방어’를 익히도록 독려하고 다른 사람들의 통쾌한 ‘성공담’도 들려준다. 하지만 정작 싸움의 기술보다는 폭력과 억압의 원인을 폭로하는 데 더 세심하게 공을 들인다. 지은이는 남녀 모두에게 묻는다. 왜 다른 종의 암컷들은 사나운 본성을 갖고 있지만 ‘여자 사람’은 위협적이지 않도록 길러지는지, 치열한 ‘미모 전쟁’을 제외한 다른 전투에 왜 여성이 적극 나서지 않는지, 중산층 여성의 성장 과정이 어째서 강아지 조련과 닮아 있는지 등. 이런 질문은, 방심한 적을 타격하는 무예 기술처럼 기습적이고 치명적이다.

2008년 11월, 성희롱에 맞서 자기 방어로 호신술을 연마하는 이집트 여성들. 자가지그/AP 연합
2008년 11월, 성희롱에 맞서 자기 방어로 호신술을 연마하는 이집트 여성들. 자가지그/AP 연합
위기의 순간 남성의 급소를 걷어차는 일이 얼마나 효과적인 공격과 방어전술인지 지은이는 힘주어 말하지만, 의구심도 든다. 반격하면 상황이 악화되지 않을까. 지은이는 그간 연구들을 볼 때, 피해자의 수동적인 모습에 오히려 가해자들의 폭력성이 증가하는 수가 많다고 반박한다. 사상 또한 마찬가지다. “급진적인 (페미니즘) 사상에 대한 지적 두려움은 결과적으로 여성 폭력을 용인하는 문화에 잠식당할 수 있다.” 지은이는 여성의 자기 방어가 사상과 정의를 옹호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페미 나치’라는 말은 1983년 극우 성향의 미국 방송인 러쉬 림보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을 비난하며 내뱉은 것이라고도 밝힌다. 이런 공격의 두려움 없이 자신의 사상을 자유롭게 펼치고 글을 쓸 수 있도록 하려면,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에 설령 동의하지 않더라도 시민으로서 이들의 권리를 함께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책 뒷부분에는 국내·외 자기방어 훈련 프로그램 목록이 실려 있다.

2006년 12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연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주말도장. 이유진 기자
2006년 12월,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연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주말도장. 이유진 기자

가사 노동 불평등 보고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평론가가 쓴 <아내 가뭄>(The Wife Drought)은 가사노동의 문제를 다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남자)가 “아내가 일을 그만둬서 아이한테도 다행”이라며 기뻐하던 일을 회상하며 그는 말한다. “왜 웃고 있는 그 친구 얼굴을 치즈 감자 그라탱에 처박아버리고 싶었을까?”

책은 쉽고 재미있게 가사노동이 성별 문제의 모든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내는 남편의 노동 능력을 향상시키는 “특별한 국가적 자원”이지만, 여성한테는 ‘아내’ 이용권이 없다. 워킹맘들은 ‘아내 가뭄’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가사노동이 ‘여성의 것’이란 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을 내보면,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노동 시간이 2배 더 길다. 한국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남성보다 5배다(2014년 통계청 자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여성의 벌이가 총 가계소득의 66.6%를 넘을 때 여성의 가사노동량이 더 늘었다. 남편과 벌이가 똑같은 여성보다 집안일을 더 많이 한다는 뜻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고소득 기혼여성은 자신의 여성성이 약화될까봐 걱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녀 모두 이런 흙구덩이에서 벗어나려면 함께해야 한다. 여성을 일터로 끌어들이는 것 못지 않게 남성을 일터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은이는 힘주어 말한다.

책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가사노동 임금화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주면, 준법투쟁으로 파업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화가 쉽지는 않다. 고용주 남편이 노동의 질을 더 엄격하게 평가할 것이 분명하니까. 더군다나 지은이의 말대로, 잠자리는 “톡 까놓고 얘기해서 ‘성매매’”가 되는 것인데, 이 또한 서비스 노동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답변은 열어둔다. 확실한 건, 직장처럼 집안일도 고민하고 연구하고 토론해야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4개 여성단체 운동동아리 주최로 연 ‘2007 페미니스트 가을대운동회'.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한국여성민우회 등 4개 여성단체 운동동아리 주최로 연 ‘2007 페미니스트 가을대운동회'.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노년은 여성이다

<나이듦을 배우다>(Learning to Be Old)는 ‘노년’이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지은이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노년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수많은 한국 여성들의 쌍꺼풀 수술”이라고 말한다. 남성의 눈으로 본 미의 잣대는 백인 여성이 ‘디폴트값’이기 때문에 억압적이다. 안티에이징도 성형 수술과 거리가 멀지 않다.

책은 노화가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에 저항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촘촘하게 결론으로 흘러간다. 노화는 평등하지 않다. 계층, 젠더, 인종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기 때문이다. 노화가 불명예라는 건 굳건한 문화적 가치일 뿐, 실제 노년은 무척 다양하며 안티에이징이나 의료산업에 흔들리지 않는 한 심지어 여성에게는 자유로움을 줄 수도 있다. 노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구조화하는 정치적 문제라는 것이 핵심이다.

고령화의 큰 피해는 여성들이 입는다. 이들은 남편과의 사별, 빈곤, 외로움, 돌봄 노동, 사회적 차별에서 오는 피로 누적 때문에 건강상 위협을 안을 가능성이 크다. 노년 여성의 문제는 지은이가 “적대자의 논리”라고 부르는 백인 중산층 남성 중심의 경쟁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이기 쉽다. ‘가난할 만하니까 가난한 사람들’이라며 노년을 스스로 책임지라는 얘기는 사회구조적 불공정 분배를 은폐한다.

성별 분업 구조에 따른 임금, 연금, 건강제도 혜택도 여성에게 불리하다. 예방 없이 질병만 강조하는 의약 산업의 횡포, 항노화 산업은 노년 여성을 겨냥해 투약을 강화한다. 개인의 행동에 책임을 묻는 개인주의 철학은 노년을 낙인찍고 자본 증식의 도구로만 삼는 기업과 정부에 핑계거리와 면책을 제공한다. 건강한 노년은 오히려 저항적 노년이다. ‘야생을 지키는 위대한 할머니들’, 세계무역기구(WTO) 비판 시위에 동참한 ‘시에라 클럽’ 같은 사례를 소개하는 까닭이다. 할머니들의 진보 연대는 가능하다! 그래서, 나이듦은 두려운 숙명이 아니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색다른 지적에도 수긍하며 안도하게 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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