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지음/문학과지성사·8000원 세는 나이로 여든을 앞둔 황동규(사진) 시인이 열여섯번째 시집 <연옥의 봄>을 내놓았다. 1958년 등단 이래 60년 가까이 꾸준한 현역으로 시를 생산해 낸 원로의 뚝심이 존경스럽다. “아끼던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가는 나라,/ 거기서도 스마트폰 눌러 피자 배달 받을 수 있는가?”(‘봄비-김치수에게’ 부분) “저세상에서도 촬영금지구역이/ 점차 개방된다는 소문 있으니/ 스마트폰을 달랑 들고 갈 테다.”(‘별사(別辭)’ 부분) 여기 나오는 스마트폰들은 어쩐지 시인이 일찍이 40대에 쓰기 시작한 ‘풍장(風葬)’ 연작의 전자시계를 떠오르게 한다. ‘풍장’의 전자시계와 근작 시들의 스마트폰은 저승으로 건너가는 이들을 이승과 이어 주는 끈 구실을 한다. 스마트폰 시들이 대표적이지만, 원로 시인에게 시 쓰기란 죽음을 길들이기 또는 죽음에 익숙해지기 연습과도 같다. 미구에 닥쳐 올 죽음 앞에 시인은 두려워하면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려 한다. 실인즉 ‘풍장’ 연작부터가 죽음의 준비였겠거니와, 장년(壯年)의 산물인 그 연작과 노년의 그림자를 거느린 이즈음의 죽음 시들 사이에는 커다른 차이가 있다. 먼저 쓰인 ‘풍장’ 연작이 죽음과의 거리를 반영한 듯 여유와 관조의 느낌을 준다면, 요즘의 죽음 시들은 한결 직접적이고 ‘반항’적이다. “바람이 구름장 놓아주듯 삶이 나를 놓아주면/ 가볍게 날아가는 저 구름 조각처럼/ 다 내려놓고 가자, 다짐하며 살았지만/ 이 저녁엔 굳이 이곳에 남아 있을 거다.”(‘이 환한 저녁’ 부분) “그래, 살아 있는 것들 하나같이 열심히 피고 열고 기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거짓말 없이 어떻게 자리 뜰 수 있겠는가?”(‘오체투지’ 부분) 세상 사람들이 ‘노년’에 기대하는 긍정과 수용 대신 한사코 뻗대고 버티려는 이런 태도야말로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만년의 양식’에 어울리지 않겠는가. 죽음을 앞둔 이의 두려움과 미련을 과감하게 드러내면서, 삶의 마지막 감각과 기억을 남김 없이 챙겨 가겠노라는 노 시인의 당당한 각오 앞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은 채 갈 거다./ 마음 데리고 다닌 세상 곳곳에 널어뒀던 추억들/ 생각나는 대로 거둬 들고 갈 거다./ 개펄에서 결사적으로 손가락에 매달렸던 게,/ 그 조그맣고 예리했던 아픔 되살려 갖고 갈 거다.”(‘연옥의 봄 4’ 부분) 글 최재봉 기자, 사진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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