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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아무도 아닌’ 사람들의 꿈 희망 슬픔 분노

등록 2016-12-08 19:43수정 2016-12-08 20:00

황정은 소설집 ‘아무도 아닌’
문학상 수상작 포함한 기대작
독자 궁금증 자극하는 여백도
소설집 <아무도 아닌>을 낸 황정은. “세월호 사태 이후 정서적으로 계속 얻어맞는 듯한 느낌 때문에 작년 겨울 이후 반년 정도 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소설집 <아무도 아닌>을 낸 황정은. “세월호 사태 이후 정서적으로 계속 얻어맞는 듯한 느낌 때문에 작년 겨울 이후 반년 정도 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황정은의 소설집 <아무도 아닌>에는 여덟 단편이 실렸는데, 이 가운데 넷이 주요 문학상 수상작이다(‘양의 미래’는 2014년 현대문학상 수상작으로 뽑혔으나 당시 <현대문학>의 검열에 대한 작가들의 항의 움직임 속에서 작가가 수상을 마다했다). 황정은에 대한 문단의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겠다.

책 제목은 수록작 ‘명실’에서 왔다. 발표 당시 ‘아무도 아닌, 명실’이었던 이 작품의 제목 앞부분이 책 제목으로 옮겨 온 셈이다. ‘작가의 말’이 따로 없는 이 책의 맨앞에는 또 “아무도 아닌, 을 사람들은 자꾸 아무것도 아닌, 으로 읽는다”는 문장이 제사(題詞)처럼 놓였다. 7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는 “‘아무도’에 비해 ‘아무것도’라는 말에는 좀 더 사물적이랄까, 덜 인간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뉘앙스가 있다”며 “책에 실린 여덟 편 소설을 읽고 나서도 각각의 화자들을 아무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했다.

‘명실’의 주인공인 늙은 명실은 먼저 죽은 친구 실리가 남긴 몇만권 책에 둘러싸인 채 실리의 이야기를 글로 써 보려 한다. 생전의 실리는 많은 책을 읽고 저 자신 글을 쓰고자 했으나 결국 완결 지어 책으로 내지는 못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 아래 차갑게 잠겨 있는 이름들이 있었고 그중에 실리가 있었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름이란 실리의 책장을 채운 수만권 책의 지은이들. 북극 빙산처럼, 드러난 이름보다는 수면 아래 잠긴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은 법이고 실리는 그 잠긴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아무도 아닌’ 사람이었던 것이고 그 점은 명실 또한 마찬가지. 그러나 이들이 서로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일조차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는가.

“죽은 뒤에도 실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난처한 상상인가. 얼마나 난처하고 허망한가. 허망하지만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소설가 황정은, 7일 오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소설가 황정은, 7일 오후 서울 마포 한겨레신문사.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런 상념 끝에 명실은 마침내 노트에 만년필로 실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문학이다. 난처하고 허망하지만 아름답고 필요한.

명실과 실리를 비롯해 <아무도 아닌>에 실린 여덟 단편의 주인공들은 도드라지거나 빛나 보이는 인물은 아니다. 낡은 아파트 단지 지하 서점의 계약직 점원(‘양의 미래’), 방 두개짜리 셋집에 가까스로 입주했으나 이웃의 소음에 시달려야 하는 여자(‘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고로 잃고 짐승처럼 칩거하는 남자(‘웃는 남자’), 백화점 침구류 매장 판매원(‘복경’) 등 한결같이 존재감이 희미한 이들이다. 이런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그들의 삶이, 그들의 꿈과 희망과 슬픔과 분노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데에 황정은 소설의 힘이 있다. 가령 ‘복경’의 인상적인 도입부를 보라.

“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요. 자꾸 웃거든요. 나는 매일 웃는 사람입니다.”

친절을 이유로 억지 웃음을 강요 당하는 서비스업 종사자의 감정 노동을 다룬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고객에게 사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웃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웃음이 고객의 화를 더 돋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쩌지 못한다. 주인의 의지나 상황과 무관하게 나오는 이 기묘한 웃음에 작가는 ‘웃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진짜 웃음이 아닌 가짜 웃음 ‘웃늠’을 웃어야 하는 감정 노동의 애환을 이 말은 어떤 웅변보다도 강력하게 알려준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 ‘복경’은 무슨 뜻일까. ‘양의 미래’에서 ‘양’은 또 무얼까. 주인공이 결코 웃지 않는 소설에 ‘웃는 남자’라는 제목이 붙은 건 왜일까. ‘상행’에서 오제를 따라 그의 친척 시골집에 고추를 따러 가는 ‘나’는 오제의 이성 애인일까 동성 친구일까(아니면 동성 애인?). 황정은의 소설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여백으로 독자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작가는 나름대로 답을 들려 주었지만, 독자들은 스스로 추리하고 상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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