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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개발독재는 허구, 민주주의가 발전의 핵심

등록 2016-12-08 19:45수정 2016-12-08 20:12

미 경제학자 윌리엄 이스털리
시장주의자로서 개발독재 비판
“전문가 독재, 정치적 실체 외면”
전문가의 독재-경제학자, 독재자 그리고 빈자들의 잊힌 권리
윌리엄 이스털리 지음, 김홍식 옮김/열린책들·2만5000원

‘시장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이승만·박정희 등 독재자의 업적을 띄우는 데 매달린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국가가 앞서서 이끄는 ‘개발독재’가 불가피했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일제 식민지배 시기마저 근대화의 씨앗이라고 치켜세운다. ‘개발독재와 독재자를 옹호하는 시장주의자’라는 이 괴상한 모순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윌리엄 이스털리 미국 뉴욕대 경제학 교수가 쓴 <전문가의 독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적절한 분석을 제공해주는 책이다. 세계은행에서 16년 동안 일했던 지은이는 <성장, 그 새빨간 거짓말>(2001), <세계의 절반 구하기>(2006) 등의 저작을 통해 서구 세계의 대외 원조 사업에 담긴 식민주의적 인식 등을 비판해왔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왼쪽). 군나르 뮈르달.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왼쪽). 군나르 뮈르달.
지은이는 맨해튼 인스티튜트에서 수여하는 ‘하이에크상’을 받기도 하는 등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를 높게 평가하는 철저한 시장주의자다. 다만 그는 ‘시장이냐 국가냐’ 하는 보편적인 논쟁과 달리, ‘자유로운 발전이냐 권위주의적 발전이냐’라는 새로운 논쟁의 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 ‘제3세계’, ‘발전도상국’ 등의 개념을 만들어 이중적 잣대를 적용한 서구 세계에 대한 비판, 빈곤 문제의 기술적 처방만을 고수하는 ‘테크노크라트’(전문가 기술관료)적 접근에 대한 비판을 더했다. 개인의 권리와 민주주의에 힘입어 ‘자유로운 발전’을 구가한 서구 세계가, 비서구 세계에는 전문가들을 앞세운 국가 주도의 ‘권위주의적 발전’을 강요해왔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지은이는 ‘발전’이라는 개념이 1919~39년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에서 태동했다고 본다. 1차대전 뒤에도 서구 열강은 인종주의를 고수하며 식민지배를 제대로 종식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정치·경제적 문제는 배제한 채 물질적인 결과물만을 목표로 제시하는 ‘테크노크라트’적 발전 논의가 득세하게 됐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비서구 세계의 권력자들 역시 제국주의에 대항한다는 차원에서 이런 발전관을 긍정했다. 지은이는 1920년대 미국 민간재단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태평양관계연구소’(IPR)와 여기의 지원을 받아 장제스 정권의 권위주의적 경제 계획을 입안했던 경제학자 팡셴팅을, ‘발전’ 모델의 첫 사례로 평가한다.

‘권위주의적 발전’은 이때부터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고, 반론은 제대로 조명조차 받지 못했다. 지은이는 “‘빈 서판’(처음부터 새롭게 시작)인가, 역사로부터의 배움인가”, “국가가 잘 되어야 하는가, 개인이 잘 되어야 하는가”, “의도적인 설계인가, 자생적인 해법인가” 등 세 가지 문제에 대한 논쟁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서구 국가에서 이미 ‘빈 서판’에 국가가 주체가 되어 경제 발전 계획을 그리는 식의 ‘권위주의적 발전’ 모델이 득세했고, 이로부터 “독재를 하긴 했지만 경제는 발전시켰다”는 식의 ‘인자한 독재자’ 이미지가 나왔다.

지은이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하이에크와 스웨덴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1898~1987)을 각각 ‘자유로운 발전’과 ‘권위주의적 발전’을 대표하며 서로 대립하는 이론가로 제시했다. 그가 보기에, 뮈르달은 “국가와 국가주의적 지도자들에게 광범위한 권력을 주는 것이 좋다고 여기고, 발전은 국가적 발전 목표를 통해서만 성사될 수 있다고 생각한”, ‘권위주의적 발전’의 대표적인 이론가였다. 반면 하이에크는 권력을 쥔 집단의 계획보다는 “자생적이고 통제 없이 이뤄지는 개인들의 노력”이 발전의 원천이라고 보는 등 ‘자유로운 발전’의 대표 이론가라고 봤다. 그러나 둘 사이에 논쟁은 이뤄지지 못했다. 뮈르달의 말처럼 이미 “국가적인 대규모 계획이 전 세계 저발전 국가들의 목표가 됐고, 이런 정책 노선이 선진국의 정부와 전문가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는 발전에 대한 서구 세계의 이중적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944년 2차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들은 브레턴우즈 회의를 통해 ‘발전도상국’을 지원하기 위한 기구로 세계은행을 출범시켰다. 그런데 세계은행 협정문에는 “세계은행과 직원들은 회원국의 정치적 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세계은행의 의사 결정은 회원국이나 그 정부의 정치적 성격에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오직 경제적 사항만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대상국에서 개인의 권리가 어떻게 억압받고 있든 민주주의가 아무리 엉망이라도, 기술적인 경제 발전 목표만 제시해주면 된다는 전형적인 ‘테크노크라트’적 접근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은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물질적 고통을 염려한다고 해서 그들의 권리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자유로운 개인의 권리를 확보해야 자생적인 경제 발전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이 아닌 ‘시장’이라는 자생적 질서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투철한 시장주의자이자 자유주의자,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진다. 지은이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이 진보하려면 독재가 필요하다는 관념이 있었지만, 나중에 한국이 경험한 역사에 의해 부정됐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의 확대가 고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개발독재를 긍정하다 못해 찬양까지 하는 한국의 자칭 시장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들의 진짜 실체는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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