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오지 눈사람
문순태 지음/오래·1만2000원
소설가 문순태가 전남 담양군 남면 생오지 마을에 정착한 것은 대학에서 정년퇴직한 2006년이었고 그곳에서 쓴 단편 여덟을 모은 열번째 소설집 <생오지 뜸부기>를 낸 것은 2009년이었다. 그로부터 7년 뒤, 단편 열편을 모아 낸 소설집 <생오지 눈사람>의 머리말에서 작가는 이 책이 <생오지 뜸부기> 이후 4년 만이라고 밝혔는데, 아마도 착오에 의한 잘못으로 보인다. 같은 머리말에서 그는 또 “이번이 내 생의 마지막 창작집이 될 것 같다”고도 썼지만, 이 역시 언젠가 잘못으로 드러나기를 바란다. 원로 작가의 지혜와 경륜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생오지 눈사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로 작가 또래 노인들이다. 이 책에서 노인들은 누군가 휴대폰으로 연락을 취해 오길 목 빠지게 기다리거나(‘휴대폰이 울릴 때’), 손주를 데리고 오기로 했던 아들이 갑자기 오지 못하게 됐다는 연락에 낙담하는가 하면(‘돌담 쌓기’), 피차 홀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유년 시절 여자친구와 외식 한번 하는 소원을 품기도 한다(‘자두와 지우개’). 요컨대 노인들은 외롭다.
열한번째 소설집 <생오지 눈사람>을 낸 작가 문순태. “노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박물관이고 도서관이며 이야기 창고”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연합뉴스
‘시소 타기’의 주인공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조소래 할머니.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뜬 뒤로는 라디오를 켜 놓고 외출하며 밤에도 불을 켠 채 자는 것으로 외로움과 싸운다. 가게 물건을 훔치거나 노인들 지갑을 빼앗는다는 소문이 있는 불량 초등생과 놀이터에서 마주친 할머니가 우연히 그 아이와 시소를 타게 된다. 고아원에서 이 아파트 부부에게 입양되었던 아이는 부부의 이혼 뒤 버림받다시피 된 상태에서 파양을 기다리는 처지. ‘시소 타기’라는 제목은 피차 외롭고 막막한 노인과 아이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상보적 관계를 상징한다.
주로 노인과 젊은이 사이의 상보적 관계는 소설집 속 여러 작품에 거푸 등장한다. ‘은행잎 지다’에는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젊은이와 그를 간병하는 마흔아홉살 여성이 등장한다. 간병인인즉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해 열다섯 나이에 이모부에게 성폭행 당한 것을 필두로 성적으로 거듭 착취를 당했으며 아들을 어린 나이에 사고로 잃고 자신도 암에 걸려 자궁을 들어낸 아픔을 지닌 인물. 준수한 외모임에도 그 나이까지 성 경험이 없었다는 젊은 환자가 죽음을 불과 며칠 앞둔 어느날 밤 꿈결에서인 듯 간병인의 몸을 더듬고 그것을 엄마뻘 여자가 받아들여 두사람이 합환할 때, 그들 사이에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은 없었다.
‘흐르는 길’에는 죽음을 결심한 남녀가 나온다. 상처한 뒤 낙담한 나머지 아내의 뒤를 따르고자 마지막 여행 삼아 차를 몰고 나온 초로의 남자, 그리고 몸 파는 일을 하다가 에이즈에 걸린 뒤 죽기로 한 젊은 여자. 예기치 않게 동행이 된 두사람이 여행 과정에서 서로에게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시키는 소중한 존재가 된다.
표제작 역시 노년과 청년의 상보적 관계를, 작가의 거주지인 생오지를 배경 삼아 그린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젊은 남녀 동수와 혜진은 인터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난 사이. 그러나 혜진이 동수의 아이를 배면서 일단 출산 이후로 ‘결행’을 늦추고, 아이를 맡길 만한 곳을 찾아 서울에서 생오지까지 오게 된 것. 마을 노인들은 낯선 젊은 커플을 따뜻하게 맞아 주고, 동수는 노인들 힘에 부치는 온갖 일을 도맡아 하는 것으로 후의에 보답한다. 사흘째 큰눈이 내려 밖으로 통하는 길이 끊긴 어느 날 오래 앓던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자 그 부인 역시 농약을 먹고 남편 뒤를 따르고, 그 소식에 놀란 또 다른 할머니 역시 돌아가시면서 마을에는 졸지에 줄초상이 난다. 눈으로 길이 막혀 구급차도 제설차도 들어오지 못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임시로 눈 무덤을 만들기로 한다. 죽은 이들의 마당가 배롱나무 아래 눈 무덤을 쓴 뒤 한 노인이 중얼거린다. “꽃이 필 때까지 눈이 녹지 않았으면 좋겄구먼.” 소식을 들은 혜진 역시 배롱꽃을 보고 싶다고 동수에게 말한다. “그때쯤이면 우리 아기 백일도 지나서인데… 그래도 배롱꽃을 보고 싶어.” 무덤과 꽃의 공존. 이 소설집의 주제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