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책 번역서
올해 교보문고의 도서판매 동향을 보면, 지난해에 견줘 소설은 18.4%, 시·에세이는 19.3% 신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출판계 불황이 점점 더 심각해질 것이란 불안감 속에 출발한 2016년, 5월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으며 도서 시장은 활기를 되찾았다. 올해 출판계 이슈로는 한국문학의 르네상스, 강남역 살인사건 뒤 더욱 관심이 쏠린 페미니즘 도서의 선전, 과학책의 인기 등이 꼽힌다. 김재인·전대호 등 철학을 공부한 번역자들이 ‘공부 내공’을 실은 저서를 내놓아 눈길을 받았고, 인류학자 권헌익의 책이 번역돼 나온 것도 반가움을 더했다. 그밖에도 페미니즘 책을 두권이나 선보인 작가 이민경, 물리학자 김상욱을 비롯한 신진 저술가들의 책들이 적지 않았다. 한해를 정리하며 <한겨레>가 뽑은 ‘올해의 책’ 국내서 10권과 번역서 10권을 소개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상섭 옮김/문학과지성사·12만원 <셰익스피어 전집>은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타계 400주년에 바치는 한국 영문학계 및 번역계의 오마주라 할 만하다. 희곡 38편과 소네트를 비롯한 시 6편 등 셰익스피어의 전 작품을 번역하는 데 정년 이후 10년 세월을 바친 이상섭 연세대 명예교수, 2년여에 걸쳐 편집 작업을 한 편집자의 노력과 열정이 합쳐져 이 기념비적인 책이 나오게 되었다. 옮긴이 이 교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대부분 운문으로 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해 4·4조와 그 변형인 7·5조 가락으로 대사를 옮겼다. 무대에 올릴 때에는 약간의 변형이 불가피하겠지만 눈으로 읽는 독자로서는 원작의 시적 특성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교수의 제자로서 역시 운문 번역을 하는 최종철 연세대 명예교수의 번역(민음사), 시인 김정환이 전체 40권 중 23권까지 낸 번역(아침이슬) 등이 마무리되면 셰익스피어 전집의 비교 독서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토드 파 지음, 엄혜숙 옮김/평화를품은책·1만2000원 많은 어른들은 어린이책이 얼마나 좋은지 잘 모른다. 어른도 간직하고 싶을 만큼 예쁜 책도 많지만, 뭔가 깨달음을 주는 그림책도 가끔 있다. <평화 책>은 제목 그대로 아이들한테 평화를 설명해주는 책이다. <강아지똥>(권정생 지음)과 같이 감동적인 이야기 흐름은 없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아!’ 하는 감탄사가 새어 나온다. 그림책의 첫 쪽, 지구의 여러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있다. 그림 위에는 한 문장이 적혀 있다. “평화는 친구를 새로 사귀는 거야.” 평화라는 게 싸우지 않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맞아, 친구가 있었어. 책장을 넘기면 역시 그림과 하나의 문장이 들어 있다. 모두 “평화는”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배운다. 평화는 다른 종류의 음악을 듣는 것이며, 눈이 내리는 걸 지켜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아프게 했을 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이르면 드디어 “평화는 친구를 안아주는 거야”라는 문장을 만난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지금 세계의 출발점 되짚어보기
이안 부루마 지음, 신보영 옮김/글항아리·2만3000원 “과거를 모르면 우리 시대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2차대전 이후 재편된 오늘의 세계를 만든 출발점인 0년, 즉 1945년 상황을 되짚어 본 책. 1937년 난징 대학살 다음 해에 일본군은 첫 위안소를 설치한 뒤 “조직적으로 젊은 여성들을 주로 한국에서 납치해 일본군 성노예로 일하게” 했다. 그 제안자는 중국파견군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 1945년 국민당군에 항복한 이 흉포한 전쟁범죄자는 전범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귀국 뒤 평화롭게 죽었다. 패전 직후 안둥으로 피난한 7만명의 재중국 일본 민간인 지도자들은 러시아군 ‘횡포’를 차단한다며 사창가를 세우고 일본 여성들을 모집했다. <0년>은 종전 직후 상황을 환호, 기아, 복수, 귀향, 독소 제거하기 등의 다양한 주제들로 나눠 살피는데, 대상은 세계 전체다. 풍부한 개인 자료들을 재구성해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10년 걸려 번역한 현대철학 길잡이
기다 겐 외 엮음/이신철·오석철 옮김/비·각권 8만원 일본 고분도(弘文堂) 출판사에서 출간된 사전들을 저본으로 삼은 5권의 <현대철학사전>이 올해 완간됐다. 2009년 선보인 제2권 <헤겔사전>부터 9년, 번역 시작부터는 꼬박 11년이 걸린 대작이다. 제1권 <칸트사전>(〃), 제3권 <맑스사전>(2011), 제5권 <현상학 사전>(〃), 제4권 <니체사전>(2016) 차례로 출간되었다. 집필자는 각 사전당 40~150여명으로 총 500명을 웃돈다. 1990년대 이후 연구 성과들을 두루 포함했기에 오래된 철학사전들보다 현대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실린 항목은 4710개, 전체 분량은 3523쪽이다. 중요 개념, 철학자들의 상세한 연보와 문헌 목록, 집필 연대표, 참고문헌 목록, 인명색인, 저작명 색인을 포함했다. <맑스사전>은 오석철·이신철이 함께 번역했고 나머지는 모두 이신철이 담당했다. 출판자로서도, 번역자로서도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한다. 이유진 기자
죽음 앞에서 사랑을 남기다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알마·2만2000원 베스트셀러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1985)를 비롯해 <뮤지코필리아>(2007) <환각>(2012) 등의 책으로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란 상찬을 받은 신경과 전문의 올리버 색스(1933~2015). 지난해 8월 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출간한 자서전이다. <온 더 무브>(2015)에서는 회고록에서 흔히 보이는 자화자찬이나 자기연민을 발견하기 어렵다. 시종일관 유쾌함과 솔직함, 예민한 관찰, 철저한 기록만이 돋보일 뿐. 그는 젊은 시절 모터사이클에 광적으로 매달리고, 대마초나 엘에스디(LSD)로 “마약 여행”을 떠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안 어머니가 “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라고 한 말은 평생 죄의식을 남겼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돌아보며 그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포함한 자신의 환자들에게 고백한다. “사랑이었으며, 어쩌면 이것이 인간애일지 모르겠다.” 이유진 기자
‘기후 행동’만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나오미 클라인 지음, 이순희 옮김/열린책들·3만3000원 역시 나오미 클라인인가. 저널리스트이자 시민운동가로서 <노 로고>(1999) <쇼크 독트린>(2007) 등을 쓴 그가 이번에는 기후변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영어판 2014)는 현장 방문과 인터뷰 등 취재와 집필에 5년이 걸렸다 한다. 이제 기후변화는 좌우파를 불문하고 모두의 관심사가 됐다. 다수의 시장주의자들조차 이 문제를 걱정한다. 빌 게이츠 등 억만장자들도 거금을 쾌척하고 있다. 클라인은 기후변화의 뿌리와 대응책들을 현장에서 하나하나 점검한다. 이를 통해 정부는 무능하고, 화석연료 기업은 권력을 휘두르며, 대형 환경운동단체는 타락했음을 보여준다. 기후변화를 기술적으로 막겠다는 지구공학자들의 엉뚱한 얘기는 실소를 자아낼 정도다. 결국 지은이는 기후변화의 본질이 자본주의에 있음을 확인하고, ‘기후 행동’을 유일한 해법으로 제시한다. “현 상황에서는 대중적 사회운동만이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도시 빈곤 속으로 몸 던진 사회학자
매튜 데스몬드 지음, 황성원 옮김/동녘·2만5000원 어느 젊은 사회학자가 가난한 사람들의 삶, 그 가운데서도 주거 문제를 파고들었다. 2008년부터 2년 가까이 밀워키에서 생활하면서, 집세가 밀려 집에서 쫓겨나는 여덟 가정의 여정에 동행한 것이다. 주거 문제의 현실을 문학적 글솜씨로 생생하게 포착하면서도, 미국 ‘주거 복지’의 현주소를 사회학적으로 탐색했다. 미국은 한국과 사정이 달라, 지은이의 진단과 제안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순 없다. 하지만 주거 문제가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고통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지은이는 “집은 삶의 중심이다. 시민의 생활 역시 집에서 시작된다”면서 주거권이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책은 주거 문제를 넘어선 ‘빈곤 연구’의 한 모범이다. 학자의 양심과 성실함, 진정성이 빛난다. 책의 마지막 부분 ‘이 프로젝트에 관하여’를 보면, 지은이와 ‘쫓겨난 사람들’ 사이에서 오간 인간적인 이야기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사회학 서적 이상의 진한 감동을 준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
지옥에서 온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사이행성·1만5800원 교보문고 2016년 정치사회 분야 3위, 알라딘 2016 베스트셀러 전체 28위이자 ‘여성학·젠더’ 분야 1위를 차지한 책. 10~20대 여성 구매자가 64%를 차지했을 만큼 이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나쁜 페미니스트>의 지은이 록산 게이는 스스로 유색인종의 뚱뚱한 흑인 여성이라 밝히며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기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를 택하겠다”고 선언한다. ‘분홍색을 좋아해도, <보그>지를 읽어도, 남자를 좋아해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며 모든 면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을 벗어 던진다. 대중음악 속 여성 혐오와 표현의 자유 논쟁, 드라마나 소설 속 남녀 캐릭터, 인종차별 등 문제적인 문화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이 특징. “나도 모순적인 사람이지만 확실한 건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 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가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도발적인 선언을 한 까닭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지디피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다
로렌조 피오라몬티 지음, 김현우 옮김, 후마니타스·1만5000원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학교가 외면한 재미나고 유익한 수학
조던 엘렌버그 지음, 김명남 옮김/열린책들·2만5000원 보통 사람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아주 다르고 재미난 수학 얘기를 수학 신동 조던 엘렌버그 위스콘신 주립대 교수가 실생활의 사례들을 통해 들려준다. <틀리지 않는 법>의 첫 번째 얘기는 ‘사라진 총알구멍’. 2차대전 때 미군은 귀환한 전투기 기체 어느 부위에 적탄을 많이 맞았는지를 조사해 총알 구멍이 많은 부위를 보강하기로 했다. 맹점은, 돌아오지 못한 전투기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 총알 구멍이 평균 둘 이하였던 엔진을 보강 대상에서 제외했는데, 이는 엔진에 2발 이상 맞은 전투기는 모두 격추당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였다. 그 허점을 간파한 이는 확률 전문가. 고수익률을 앞세운 ‘족집게’ 뮤추얼 펀드 투자의 함정 역시 살아남은 펀드들만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그런 식으로 스웨덴형 복지가 망국의 길이라는 복지 비판론자들 주장의 허구성을 간파하고, 선거 때의 부동층 증가 원인도 유권자들의 신중함보다는 정보 부족·무지·무관심 탓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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