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들이 만든 1일 가마니 시장. 아동 노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사진으로 보는 서울 2>(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2)에 수록.창비 제공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 수탈사
인병선·김도형 엮음/창비·2만3000원
쌀만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아니었다. 가마니까지 착취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 농민들이 짠 가마니는 1년에 최대 1억장. 고리대금을 간신히 얻어 먼 시골까지 가 볏짚을 구해온 농가에선 아이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이 밤새 매달려 가마니를 짰고, 이튿날 아침엔 그 무거운 걸 짊어진 채 읍내 장까지 부랴부랴 수십리길을 나섰다. 가마니는 농민 수탈의 상징이었다.
<가마니로 본 일제강점기 농민 수탈사>는 가마니 생산에 관한 1910~40년대 신문기사 340개를 가려 엮은 자료집이다. <껍데기는 가라>를 쓴 시인 신동엽(1930~69)의 아내이자 일제 말 농업경제학자 인정식(1907~?)의 딸인 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장이 모은 가마니 관련 자료를,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정리하면서 모자라는 부분을 조사하고 채워 현대어로 고쳐 실은 것이다.
이를 보면, 일제는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 뒤 쌀 공급지로서 한반도를 효율적으로 지배하려 했다. 일본의 과잉 인구를 한반도로 대거 이주시켰고, 조선의 소작제도를 활용해 쌀과 노동력을 수탈했다. 조선총독부는 가마니 짜기를 촘촘하게 계획·관리했다. 일본어 ‘가마스(かます)’에서 온 ‘가마니’는 쌀 운반 용기이면서 거래 단위이기도 했다. 조선의 ‘섬’보다 부피가 작아 운반을 편하게 한 것이다.
1941년 3월2일치 <매일신보>. 가평군은 가마니 33만매 생산 목표를 세우고 군수, 서장 이하 각 읍면장, 주재소 직원들이 각 부락을 돌며 가마니 짜기를 장려했다는 내용의 기사다. 가마니가 산처럼 쌓였다. 창비 제공
1940년 5월6일치 <매일신보>에 실린 ‘가마니 보국운동’ 기사. 창비 제공
1907년께 전남 나주에서 일본식 가마니가 처음 제작되었다. 1910년대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쌀 수탈 기본자료를 만들었고, 일본의 ‘쌀 폭동’을 타개하려 쌀 수탈 농정책을 확립했다. 겉으론 농한기 도박을 일삼는 농민들의 근검 생활을 정착하고 농가 소득을 늘린다는 명분이었다. 전습회(교습회)와 가마니 짜기 경진대회 개최, 모범부락 선정, 기계 공급을 독려했다.
1920년대는 산미증진계획 시행기. 쌀을 일본으로 보내려면 더 많은 가마니가 필요했다. 총독부는 내구성, 두드림 정도나 거적의 엮음새를 포함한 직조방법, 포장방법 등을 모두 담아 ‘가마니검사규칙’(1927)을 시행했다. 소빈농층에게는 어마어마한 부담이었다. 1939년 1월28일 청주에서는 검사원이 ‘갑질’을 하며 생산자들을 구타, 폭행해 300여명 농민들이 가마니를 팔지 못하고 도로 지고 울며 돌아가기도 했다. 생산자들은 가마니 값 조정, 검사원 징계 등을 요구하며 종종 시위를 했다.
1941년 <매일신보> 2월23일치에 실린 강화입직경기(가마니 짜기 경기)대회. 창비 제공
가마니 착취의 정점은 1930년대였다. 일제는 대륙 침략 전쟁을 벌였고, 조선은 병참기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소작쟁의를 막는 조선소작조정령(1932), 조선농지령(1934)이 잇따랐다. 한반도 남녀노소는 가마니 짜기에 내몰렸다. 10살이 채 안 된 꼬마들을 포함해 졸업생·재학생까지 본격 동원해 ‘가마니 치기 경기대회’를 열었다. 학교는 가난한 학생들한테 가마니를 짜 학비를 보충하도록 했다. 어릴 때부터 ‘근로정신’을 함양해 농촌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구실을 댔지만 실은 ‘애국 가마니’를 위한 아동 강제 노역이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은 금속, 면화, 피혁, 생활용품까지 모두 공출하는 근거가 됐다. 가마니 생산·판매 대금은 기관총, 배, 비행기 헌납금이 되었는데 비행기의 이름은 ‘가마니호’였다. ‘가마니 보국운동’에는 명절도 없었다. 가마니를 짜지 않는 농가엔 광목과 고무신 배급을 하지 않았고 대회 1등에겐 황소를 주는 등 당근과 채찍을 구사했다. 눈먼 부부가 가마니를 짜 헌금했다는 ‘미담’도 신문에 실렸다.
언론의 구실은 컸다. “전도 유망한 새끼·가마니 제조”(<동아일보> 1924년 11월7일치) “농한기에 부업열 왕성”(<조선일보> 1929년 12월16일치) “일치단결하여 가마니 제조”(<매일신보> 1930년 9월2일치) 등의 기사가 심심찮게 나왔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특히 농민을 통제하고 체제를 선전하는 ‘스피커’였다. “가마니 검사가 혹독”(<동아일보> 1925년 1월9일치)하다거나 일본인이 가마닛값을 달라는 농민을 총검으로 위협(<조선일보> 1926년 1월11일치)했다는 비판적 기사와 르포가 실리기도 했다.
1926년 군산항 제3차 축항 기공을 기념한 쌀탑. '축 축항기공 역전정우회'라 적혀있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소장 사진.창비 제공
책을 보면, 일제의 잔혹한 수탈과 노동 통제가 당시 한반도 사람들의 일상을 얼마나 촘촘하게 지배했는지 분명히 드러난다. 가마니 짜기는 ‘자력 갱생’, ‘근로 정신’, ‘근면’, ‘애국’이란 미명으로 포장된 수탈 정책이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 시절 항공기 헌납이나 전쟁 시기 소비 절약을 강조하던 애국 기획, 박정희 정권 때 새마을 운동의 체제 선전과 계몽, 각급 학교가 모아 낸 ‘국방헌금’의 기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빨리빨리’의 구호 또한 이때부터 시작한 것일지도. 가마니 짜기 경진대회는 누가 가장 빨리 짜는지를 겨뤘다. 훗날 공장근대화의 ‘시간’ ‘생산성’ 개념이 적용됐던 셈. 앞으로 더 활발한 연구를 낳을 소중한 역사 자료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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