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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희진의 어떤 메모] 은은한 당신

등록 2016-12-30 21:11수정 2016-12-30 21:26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가만한 당신> & <함께 가만한 당신>, 최윤필 지음, 마음산책, 2016

영화 <클로저>(2004)의 주인공 중 한 명은 신문사 부고 담당 기자(주드 로)다. 소설가를 꿈꾸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나라면 한가한(?) 업무 특성을 활용해 작가가 될 텐데” 같은 망상을 하며 주드 로를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가만한 당신>, <함께 가만한 당신>을 펼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자 최윤필은 <한국일보>에 근무하는 25년차 기자다. 이 책은 그가 2014년부터 매주 토요일 원고지 30장씩 연재하고 있는 동명의 부고 기사를 묶은 것이다. 선의에서 신선한 발상이 나온다는 것을 증명하는 기획이다. 지구상에 이렇게 다양한 문제, 다양한 질문과 투쟁으로 살다 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배웠다. ‘위인’의 개념이 바뀌었다. 두 권에 칠십 명의 삶이 등장하는데 글로 쓴 내셔널지오그래픽 같다.

글쓴이가 궁금한 책이다. 책날개를 펴는 순간, 이제까지 한국 남성 필자 중 이런 자기소개는 본 적이 없다. “이성애자 사내아이로 태어나(중략) 요컨대 나는 국적, 지역, 성, 젠더, 학력 차별의 양지에서 살았다”. 대개 남성 저자들은 젠더, 인종, 장애 문제에는 관련 의제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 독특하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다. 나는 왠지 저자의 인생 레퍼런스(‘참고 문헌’)를 알 것 같다.

책 내용은 외신 부고 가운데 저자가 “끌린” 인물을 선정한 뒤 최선을 다해 최대한 자료를 추적해서 구성한 ‘생애사’다. 한 인간의 삶을 한정된 지면에 전달하기 위한 노동이 역력하다. 이 노력은 인물에 대한 애정과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에 대한 부채의식, 윤리성에서 나온다. 매력적인 제목 <가만한 당신>. 이 글을 쓰기 위한 시간의 반 정도는 제목의 의미를 파악하는라 골몰했다. 결국, 전화 통화를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출판사에 전화를 걸었다.

“조용히, 가만히 있다”는 뜻이란다. “드러나지 않아 조용했고 은은했으며 떠난 뒤에도 가만한 당신”(뒤표지). 널리 알려지거나 요란스럽지 않았지만 세상의 치명적인 틈새를 몸으로 메웠던, 인류가 크게 빚진 사람들이다. 가만한 사람들이었지만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던 이들이다. 이들을 “은은한 당신”이라고 표현하다니. 저자의 소박하지만 단단한 정신이 부럽다. 글쓰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국제정치학을 거대 의제를 다룬다는 의미에서 “고위 정치”(high politics)라고 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저자의 시선은 반대다. ‘저인망’(bottom trawl)에서 쏟아진 역사를 쪼그리고 앉아 일일이 다듬는 저자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부고 기사에 유족이 누구인가가 아니라 당대 사회를 썼다.

어찌 다 소개하랴. 한 인물만 이야기하자. 부고 책이라고 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고 샀다. 나의 관심사가 자살이어서, 미국의 심리학자 노먼 파버로부터 읽었다. 파버로는 자살연구자다. ‘생명의 전화’ 창시자이자 자살 생존자(자살 시도에 실패한 사람이 아니라 자살한 가족을 둔 사람)들의 심리 치유에 일생을 바쳤다. 자살이 사망 원인 1위인 한국은 야만 사회다. 자살은, “당신을 이해한다”는 한마디의 공감만으로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친구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15년간 치료해왔던 담당 의사가 “당신은 의사인 내가 봐도 죽을 만큼 고통을 겪고 있다. 죽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대신, 며칠만 미루라”고 말했다. 그녀는 이 말을 붙잡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저자가 파버로의 인생에 붙인 타이틀은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예방하다”(<가만한 당신>, 60쪽).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서만 회복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힐링이 어려운 것이다. “양지에서 누릴 것 다 누리고 살았지만, 노력 중인 저자”가 전한 아름다운 이들 덕분에 어느 ‘음지의 독자’가 크게 위로받았음을 고백한다. 올해 나는 해피엔딩이다.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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