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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말 없음과 모두 말해지는 것 사이, 변사의 몫

등록 2017-01-05 18:48수정 2017-01-05 19:40

무성영화 변사 소재 소설 ‘변사 기담’
작가 양진채 “고향 인천에 빚갚은 느낌”
“변사와 소설가 모두 말을 다루는 존재”
무성영화 변사를 주인공 삼은 장편 <변사 기담>을 낸 소설가 양진채. “변사와 소설가는 말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변사가 대중을 휘어잡는 데에 치중하는 반면 나는 대중적 소설을 피하려는 강박 같은 게 있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무성영화 변사를 주인공 삼은 장편 <변사 기담>을 낸 소설가 양진채. “변사와 소설가는 말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변사가 대중을 휘어잡는 데에 치중하는 반면 나는 대중적 소설을 피하려는 강박 같은 게 있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변사 기담
양진채 지음/강·1만4000원

“인천은 사실 서울의 변방 같아서, 제 고향인데도 전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인천 공부를 새로 하다시피 했죠. 개항 중심지로서 신 문물이 경성으로 향하는 길목이 바로 인천이었잖아요. 소설을 마치고 나니 고향 인천에 진 빚을 어느 정도 갚은 느낌입니다.”

인천의 소설가 양진채가 1920년대 후반 인천을 배경 삼은 소설 <변사 기담>을 내놓았다. 1894년 협률사로 출발했으며 192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여전히 운영 중인 애관극장의 변사 윤기담이 주인공이다. 변사란 무성영화 시절 영화 속 상황과 배우들의 대사를 극장 무대 한쪽에서 육성으로 들려주던 이들. 기담 자신은 “무성영화에 말을 입히는 일은 한편의 영화를 완성시키는, 화룡점정과 같은 것”이라 여긴다.

지금은 없어진 직업인 변사를 젊은 세대가 상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 묘사된바 당시 변사는 오늘날 아이돌 가수 못잖은 인기를 누렸다. 영화의 흥행을 좌우함은 물론 열렬한 팬덤을 형성하기도 했다.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 ‘구라’로 통하는 소설가 황석영이 술자리에서 선보이는 개인기 중에도 변사 흉내가 있다. <변사 기담>의 작사가는 <유명 변사해설집>과 <조선시나리오 선집> 같은 책을 참조해 변사의 사설을 재현했다고 하는데, 영탄조와 반복 어구로 통속적 감정을 극대화하는 것이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청춘이 가는구나, 애달픈 청춘이구나. 이 둘의 사랑을 누가 갈라놓았단 말인가. 무엇이 이리도 야속하단 말이냐. 아, 청춘, 청춘,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청춘의 꽃이여.”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소설은 몰락한 양반가 출신으로 변사의 꿈을 이룬 기담과 기생 묘화의 사랑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기담이 정식 변사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만나고 마음을 나누게 된 두사람. 뒤늦게 확인한 어린 시절 인연은 둘의 관계를 운명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듯하지만, 묘화를 둘러싼 수수께끼는 섣부른 낙관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아버지 같은 인물인 영국인 맥코넬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한발을 들인 묘화가 보기에 “겨우 한 여자의 마음을 얻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사내” 기담의 시야는 너무 좁고 사소하다. 그가 기담에게 “선생께 영화는 무엇이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자리한다.

기담은 다른 맥락에서 영화에 대한 고민을 이어 간다. 말이 없어도, 표정과 행동만으로 얼마든지 뜻을 전달하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는 변사라는 직업의 의미와 가치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게끔 한다. 스스로가 ‘말의 조롱’에 갇힌 것 같다고 느끼는 그가 묘화에게 하는 말이다.

“말을 하지 않는 시간도 영화의 시간인데 말이야. (…) 어쩌면 나는 영화를 살린 게 아니라 망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심사가 좀 우울했어. 말로 먹고살았는데 그 말이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영화는 무엇이냐는 묘화의 질문에 기담은 뒤늦게, 혼자서 답을 내놓는다. “말 없음과 모두 말해지는 것 사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말을 다룬다는 점에서 변사와 작가의 일은 통한다. 영화에 대한 기담의 고민과 답이 작가 양진채의 문학적 고민 및 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 묘화의 제안에 따라 기담은 저답지 않은 일에 몸을 담근다. 일제 통치에 저항하는 시위를 조직하기 위한 무료 영화 상영회에서 연행을 맡기로 한 것. 결국 예정대로 시위가 벌어지고, 기담은 경찰에 잡혀가 혀를 잘리는 고문을 받는다. 말로 먹고 살았던 이에게는 가장 가혹하고 얄궂은 형벌인 셈이다. 수십년 만에 날아든 매화의 편지 한통이 기담을 변사 시절로 데려가는데, 변사의 사설을 되살리고자 하는 영화학도 증손자 정환의 작업은 그 일의 현재적 의미를 곱씹게 한다. 정환은 자신이 기담한테서 변사 사설을 배우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하기로 하거니와, 그 과정은 근 한세기에 걸친 한국 영화의 시간적 거리를 메꾸는 작업이기도 하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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