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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여성 삼대 예술가의 미적 추구와 모성

등록 2017-01-19 19:28수정 2017-01-19 19:51

명지현 두번째 소설집 ‘눈의 황홀’
표제작 등 다채로운 단편 여덟
언론민주화 투쟁과 세월호 흔적도
눈의 황홀
명지현 지음/문학과지성사·1만2000원

늦깎이 작가 명지현의 두 번째 소설집 <눈의 황홀>에는 단편 여덟이 묶였다. 소재와 주제가 매우 다채롭다는 것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예술가 소설 계보로 볼 수 있을 표제작에서부터 진흙 인간(‘흙, 일곱 마리’)과 김유정 로봇(‘단어의 삶’)을 등장시킨 에스에프적 소설, 한반도 통일 뒤 혼란기를 배경 삼은 근미래 소설 ‘네로의 시’, 언론 민주화 투쟁으로 해고 또는 정직된 언론인들을 등장시킨 ‘숲의 고요’, 낙태 여부를 놓고 고민하는 미혼 여성을 그린 ‘구두’, 아버지가 사라진 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소년을 내세운 ‘실꾸리’, 그리고 노 화가와 그에게서 작품을 받아 내려는 기획사 여직원의 실랑이를 중심으로 짜인 ‘하양’ 등….

표제작은 작가의 첫 번째 소설집 <이로니, 이디시>(2009)에 실렸던 단편 ‘충천’(蟲天)을 떠오르게 한다. 벌레 그림에 매혹된 나머지 눈동자 안에 벌레를 키우던 도예가(‘충천’)가 이 작품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가야만 볼 수 있다는 꽃을 만나고자 위험을 무릅쓰는 인조꽃 장인 화장(花匠)으로 바뀐 형국이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를 거쳐 주인공 겸 화자 ‘나’로 이어지는 여성 삼대 화장을 통해 출산과 모성 같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과 예술(가)의 본질 사이 상관관계를 파고든 점이 인상적이다. 책 뒤에 해설을 쓴 문화연구자 오혜진은 “여성의 출산·양육을 숭고하거나 비천한 ‘창작’ 행위로 간주하는 모성 신화, 그리고 거기서 발생하는 예술과 모성의 모호하고도 불철저한 유비”를 이 작품이 예민하게 포착했다고 평가했다.

소설집 <눈의 황홀>을 내고 19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 명지현. 오혜진의 다소 비판적인 해설에 대해 “작가가 합리적 비판에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며 담담하게 웃어 넘겼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소설집 <눈의 황홀>을 내고 19일 오후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 명지현. 오혜진의 다소 비판적인 해설에 대해 “작가가 합리적 비판에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며 담담하게 웃어 넘겼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오혜진의 해설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숲의 고요’의 화자인, ‘정직’된 언론인의 아내 역시 그림책 작업을 하는 삽화가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피디라는 본업에서 떨려나 텃밭의 채소를 가꾸거나 정원의 나뭇가지를 전지하는 일에나 열심인 남편의 답답함과 울분이 전면에 부각되지만, 그 남편 때문에 정작 자신의 일에 매진하지 못하는 예술가 아내의 불만과 불안도 결코 사소한 것은 아니다. 남편과 함께 선배 및 동료 해직 언론인들의 등반에 따라나서기도 하지만, “언제쯤 내 일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을까” 하는 고뇌 어린 궁리를 떨쳐 버리지 못한다. “뒤집혀야 남편이 복직된다”는 기대가 아직 살아 있던, 2012년 대통령선거 직전 시점을 택한 이 소설에서 작가가 뚜렷한 결말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혼자 날고 싶은 건 나만이 아닐 것”이라며 남편에 대한 이해와 유대감을 표하는 한편 해고 노동자 자녀들 그림 지도 프로그램 참여 의지를 밝히는 소설 결말부는 암울한 현실을 타개할 힘으로서 연대와 의지적 낙관을 한껏 부각시킨다.

작가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46일 단식을 접은 2014년 8월28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릴레이 단식에 참여했다. 단편 ‘구두’는 그 자리에서 떠올린 작품이라 했다. 주인공의 독백 또는 뱃속 태아에게 들려주는 혼잣말 형식을 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광화문광장에서 마주친 세월호 추모 리본에서 그간 낙태한 아이들을 떠올린다. “죽은 아이들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어. 눈이 시리게 빛나는 노란색, 그 샛노란 빛깔은 내가 그동안 한 짓을 잘 아는 것 같더라. 나는 참 많이도 죽였다.”

해설을 쓴 오혜진이 보기에 이 설정은 “국가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인해 발생한 사고의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일과, 여성 스스로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는 일”을 동일시하는 잘못이다. “우리 모두 빨간 구두를 신은 거야. 죽을 때까지 빙글빙글 춤춰야 해”라며 자본주의의 간지(奸智)를 겨냥한 대목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나-여성’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불행으로 의미화할 위험이 있다”고 오혜진은 경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말미에서, 결혼으로 아이를 책임지겠다는 남자친구의 제안을 뿌리치고 “결국 너와 나 둘만 남았어”라며 홀로 길을 나서는 주인공의 결단에 실린 독립 의지는 그것대로 평가할 만하지 않을까.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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