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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콩처럼 사소한 지상의 존재들, 별 되어 하늘로

등록 2017-01-26 18:01수정 2017-01-26 19:31

김도연 소설집 ‘콩 이야기’
고향 평창 배경에 환상 가미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파”
콩 이야기
김도연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고향인 강원도 평창 진부도서관을 작업실 삼아 십여년째 드나들던 ‘도서관 작가’ 김도연(<한겨레> 2012년 6월16일치 20면 ‘그 작가 그 공간’)이 새 소설집 <콩 이야기>를 묶어 냈다. 동계올림픽의 여파는 작가의 고향 마을에도 미쳐, 2014년 원주로 작업실을 옮긴 그는 지금은 횡성도서관을 출입한다.

표제작은 ‘그 작가 그 공간’ 연재 기사에서도 언급했던 작품이다. 그러나 책으로 묶이면서, 잡지 발표 당시에 비해 이야기가 한결 풍성하고 깊어졌다. 도서관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콩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자 하는 작가 ‘나’의 몸부림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지는데, 퇴근길 밤하늘에서 만난 별이 지상의 콩과 다르지 않다는 소설 말미의 깨달음이 인상적이다.

“누가 되지 않는다면 그 별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목욕탕에서 때를 미는 때밀이, 할머니 등에 업혀 장에 가는 아기, 도서관 옥상에 콩을 심는 사서, 콩 자루를 들고 툴툴거리며 시내버스를 타는 나, 매일같이 콩과 팥을 나누고 합치고 다시 나누는 어머니와 아버지…”

소설집 <콩 이야기>를 내고 25일 오후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작가 김도연. “이번 소설집을 끝으로 ‘나’에 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소설집 <콩 이야기>를 내고 25일 오후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작가 김도연. “이번 소설집을 끝으로 ‘나’에 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콩처럼 “사소하고 자잘하고 오밀조밀”한 지상의 인간들이 하늘의 별만큼 높고 거룩한 존재라는 생각은 이 소설집 <콩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책에 실린 아홉 단편은 대부분 작가의 고향 평창과 대관령 언저리를 배경 삼는다. ‘옛 애인을 싣고 달리는 버스’만은 네팔을 여행하는 신혼부부의 이야기지만, “가만…내가 결혼을 한 게 사실일까?”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환상의 소산일 수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현실과 뒤섞이는 꿈과 환상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민둥산’에서도, 5년 만에 불쑥 나타나 결혼을 조르는 옛 애인을 실랑이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은 아무래도 꿈이나 환상일 가능성이 크다. 시골 마을 골짜기까지 파고든 유흥술집에 멧돼지며 고라니, 흑염소 같은 짐승들이 손님으로 드나든다는 ‘애니멀즈 단란주점’의 설정 역시 김도연 특유의 환상적 처리가 빛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김도연 소설의 환상은 그 환상이 배태된 고향이라는 그림자를 결코 떨쳐 버리지 않는다. 유머와 페이소스와 서정을 버무린 그의 소설들은 고향의 풍요와 가난, 별을 닮은 거룩함과 막장 같은 타락에 균형 잡힌 눈길을 준다. 가령 표제작에서 지상의 콩 같은 인간들이 별과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은 ‘나’는 별을 올려다보며 걷다가 넘어져 흙을 묻힌 채 집으로 들어오는데, 마지막 문단이 이러하다.

“술 취한 아버지는 잠들었고 돋보기를 쓴 어머니는 둥근 상 위에 콩을 가득 올려놓고 하나하나 고르는 중이었다. 오래된 경전을 읽듯이. 내 꼬락서니를 훑어본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애비나 자식이나…’.”

수십년째 읍내 다방을 지켜온 마담을 상대로 다방의 역사와 현실을 취재하는 소설가를 등장시킨 ‘별다방의 몰락’ 마지막 장면은 어떠한가. “소설가 양반은 그 업종이 사양길로 접어들어도 소설을 계속 쓸 생각이오?”라며 고담준론을 주고받는 대목까지는 그럴싸하다. 노인 손님들을 상대로 수상쩍은 ‘영업’을 하다가 남편에게 들켜 짬뽕 국물을 뒤집어쓴 마담은 두루마리 화장지를 내미는 소설가에게 일갈한다. “이 새끼야, 너도 소설 그만 쓰고 나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온 노파 옥순이를 등장시킨 ‘배 지나간 자리’에서 (아마도 환상 속에서) 요양원 밖 모래 산에 오르는 옥순은 “모래 위에 찍히는 발자국 하나하나에 안타까이 사라지려는 그 이름들을 새겨넣는다.” 가까운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잊고 소, 개, 닭, 돼지, 염소, 옥수수, 감자, 콩, 배추, 무의 이름도 잊어가던 옥순이 발자국에 새겨 넣으려는 이름들은 ‘콩 이야기’에서 별이 되어 올라간 것들과 다르지 않다. 사소해서 잊히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것들을 별의 자리에 올리는 일이 곧 소설이요 문학이 아니겠는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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