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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어른 드문 세상의 어른다운 건물

등록 2017-01-26 18:06수정 2017-01-26 19:11

임석재 교수의 첫 건축 에세이
오래된 건물 보는 따뜻한 시선
“쌈박한 가치, 거의 종교” 비판
“나이 먹은 건물이 선사하는 시간이라는 선물”을 보여주는 종각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변화가 심하고 이국성 또한 강한 건물”인 종로타워가 겹쳐 보이는 장면. 홍문각 제공
“나이 먹은 건물이 선사하는 시간이라는 선물”을 보여주는 종각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변화가 심하고 이국성 또한 강한 건물”인 종로타워가 겹쳐 보이는 장면. 홍문각 제공
시간의 힘
임석재 지음/홍문각·1만8000원

<시간의 힘>은 1995년 첫 책 <추상과 감흥> 이후 50권의 저서를 쓴 건축사학자 임석재(56)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의 첫번째 건축 에세이다. 2008년 서양건축사 통사(‘임석재 서양건축사’, 전 5권)를 완간하며 학술서를 외면하는 국내 지성계의 척박한 풍토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지은이는 이번 신간에서 “신변잡기+선생의 잔소리+건축 얘기”까지 가뿐하게 통합한다. 1만여권의 책을 소장한 장서가이자 건축학적 지식, 문명 비판, 현실 비평을 아우르는 책들을 20년 넘게 써 온 글쟁이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은 서울 도심이나 변두리에 남은 평범한 ‘나이 먹은 건물’을 의인화해서 감정을 적용하고 인간과 건축의 관계를 설명한다. 나이, 시간, 중년, 자식, 친구, 누나 같은 열쇳말을 통해 인간의 개인사와 오래된 건물의 역사를 두루 꿴 것이다.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삼일로의 삼일빌딩, 신촌의 대학 건물들, 염창동 구두거리, 한강대로 서민주택, 태극당 빌딩 같은 일상적인 공간에다 시시콜콜한 추억, 나이듦에 대한 심상, 세태 비평까지 녹여 숨을 불어넣었다. 오래된 공간에 담긴 임 교수의 추억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중산층 화이트칼라 50대 남성들에게는 독특한 세대 감각과 감정이입을 선사하는 한편,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지은이의 시선과 위치성을 짐작할 수 있도록 맥락을 제공한다. ‘에세이’라지만 독자의 안목을 높이는 기능적 측면도 강한 책이다. ‘이야기의 힘’이 평소 예사로 보아오던 빌딩, 집, 골목, 시장통 등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나이’를 ‘먹는다’, ‘역사’가 ‘쌓인다’, ‘세월’이 ‘흐른다’고 달리 표현하는 점을 지적하면서 젊음을 찬양하고 세련된 건물을 선호하며 미학보다 부동산 개발·기획으로 건축의 가치를 매기는 요즘 현상을 꼬집는다. 오래된 시간의 힘을 상징하는 종각과 “대한민국에서 가장 변화가 심하고 이국성 또한 강한” 종로타워 사이를 무심하게 오가는 중·노년층의 얼굴 주름을, 지은이는 “다치고 지쳤지만 단련된 주름살”이라며 애정으로 표현한다. 반면에 “최신 유행일수록 건물 입면이 평평”하다며 “매끈한 산업 재료와 간결한 기하학적 조합이 만들어내는 ‘쌈박함’이라는 조형 가치는 미덕을 넘어 종교와 신화의 반열에 올랐다”고 꾸짖는다. 최신식 건물의 매끄러운 표면은, 노인이 평생 어렵게 쌓아올린 ‘시간의 힘’을 거부하며 팽팽한 피부를 만들려고 애처롭게 노력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압축 근대의 트라우마, “늦은 근대화를 만회하려는 지각생의 초조함”을 벗고 “어른의 부활”을 추구하자고 지은이는 말한다. “나이 먹은 건물”의 가치를 찾아내자는 얘기다.

‘어미 건물’인 교보생명빌딩과 ‘새끼 건물’인 디(D)타워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 홍문각 제공
‘어미 건물’인 교보생명빌딩과 ‘새끼 건물’인 디(D)타워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 홍문각 제공
임 교수는 미끈한 유리 표면보다 “굴곡진 구성미를 갖는 나이 먹은 건물”의 “아기자기-이러쿵저러쿵-요모조모”한 면을 사랑하는 쪽이다. 번쩍거리는 최신 건물을 보면서 괜스레 얼굴을 찡그려 본 사람에게 이 책은 불쾌감의 이유를 후련하게 해명해주고, 오래된 건물들의 위엄을 훼손하거나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형제자매처럼 다정하게 어울려가는 새 건물들의 미덕도 발견해준다.

“아기자기-이러쿵저러쿵-요모조모”라는 구성미와 서사는 책 전반을 관통하는 정서이기도 하다.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의 상징색인 갈색이 “몽골 초원에서 말 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칭기즈칸 후예의 피부 색깔”을 주문한 설계 당시 건축주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는 후일담이나 그 뒤에 새로 세운 디(D)타워가 ‘어미 건물’인 교보빌딩이라는 원본을 살려 디자인한 ‘새끼 건물’이라는 사실 등을 들려주며 ‘도시 서사’를 재구성하는 식이다. 이런 이야기를 알게 되면 보는 눈이 달라지고, 눈이 달라지면 감정이 생긴다. 지은이가 목청 높여 ‘보존’을 부르짖지 않아도 가랑비에 옷 젖듯 오래된 건물의 귀함을 알게 된다.

개인적 일화를 곳곳에 담은 에세이다 보니 60~70년대 ‘근대화 가족’을 체험한 서울 출신 중년 남성의 시선(‘누나의 이미지’, ‘여성의 모성’)이 툭툭 걸리기도 하지만 “이러쿵저러쿵”한 솔직한 가족사를 읽으면서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되고 만다. 쉽고 분명한 우리말을 고르고 다루는 솜씨, 고급 학문의 내용을 진지하게 풀어놓다 갑자기 허를 찌르는 유머 감각은 더 높이 살 만하다. ‘어른’의 여유와 미덕을 찾기 힘들어진 시대 아닌가. 이 또한 ‘미학’을 응원하는 지은이가 익힌 ‘시간의 힘’ 덕분일 것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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