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
김정아 지음/클·1만2000원
“걔는 감독님 같은 사람들이 제일 싫대요. 부자들한텐 돈을 얻고 가난한 사람들한텐 이야기를 얻는다구요.”
김정아의 소설집 <가시>에 실린 단편 ‘몽골 낙타’에서 주인공인 중학생 소녀 유진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카메라에 대고 이렇게 쏘아붙인다. 아버지를 모른 채 성장한데다 엄마마저 집을 나간 뒤 알코올중독 외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유진은 가출한 친구를 핑계 대며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대표되는 어떤 이들의 허위의식에 일침을 놓는 것이다.
<가시>는 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오래 활동했으며 지금도 자치단체의 인권 관련 일을 하는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수록작 중에는 참여적 문인 모임 ‘리얼리스트 100’의 기관지나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발표한 작품도 있지만, 작가 자신은 신춘문예나 잡지 신인상 같은 공식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소설집 출간이 그에게는 등단인 셈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유진의 힐난만큼이나 불편한 것이 표제작 주인공 윤미희의 존재일 것이다. 노조 지부장으로 복직 투쟁 중인 화자의 눈에 처음 비친 윤미희는 입이 거칠고 행동도 막무가내인, 술주정꾼 말썽쟁이. 공장 노동자 시절 ‘학출’ 노동운동가에게 농락당한 뒤 복수하겠노라 흉기를 들고 날뛴 일로 오랜 옥살이를 했다는 윤미희의 고백은 그의 황폐한 마음과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끔 한다. 그럼에도 명동성당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는 화자 일행의 천막을 찾아와 “야, 이년들아, 나도 피해자야, 피해자!”라 주정하는 윤미희의 행티에 유보 없이 공감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다.
‘마지막 손님’은 2009년 1월20일 벌어진 용산참사의 ‘전야’를 그린 작품이다. 시장 사람들이 철거 위기에 맞서 망루로 올라가자 국숫집 노파 선례씨는 그들에게 마지막 국수를 삶아 대접하려 한다. 그런 선례씨와 함께하는 커피 행상 남순씨의 말 “인자, 여기 우리밖에 사람이 없지요?”는 ‘여기 사람이 있다’는, 용산참사의 비인간적 폭력을 고발하는 선언을 떠오르게 하며 독자를 8년 전 그곳으로 데려간다. 책에는 부산 산동네에서 보낸 유년기를 그린 ‘석류나무집’, 각각 빨치산 출신 노파와 가족간첩단 사건 연루자를 등장시킨 ‘도토리 한 줌’과 ‘곡우’ 등 모두 여덟 단편이 묶였다.
“10년 동안 쓴 작품들을 정리해서 책으로 묶어 내니 사회적 인정 욕구로 인한 콤플렉스를 벗은 것 같아 행복하다”는 작가는 “기본적으로 리얼리즘 계열 작품을 계속 쓰겠지만, 형식적으로는 새롭고 실험적인 도전을 시도해 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최재봉 기자, 사진 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