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유학자 평전 잇단 출간, 한영우 교수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이이와 단짝 성혼 평전 최근 펴내
벼슬 대신 후학양성 ‘참선비’ 그려 “성혼 간언, 내 등에 땀이 날 정도
조선시대 언론 힘, 지금보다 셌다
세종 등 어렵게 오른 왕 소통 능해” 그가 1997년에 쓴 한국사 개설서 <다시 찾는 우리 역사>는 이 분야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20만권 가까이 팔렸다. 영어, 일어, 러시아어에 이어 곧 중국어 번역본도 나온다. “이념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려 해 많이 팔리는 것 같습니다.” 성혼(1535~1598) 평전은 2013년 나온 이이 평전을 쓰면서 함께 쓴 것이다. 성혼은 이이와 실과 바늘 관계다. 같은 파주 출신으로 성혼이 한 살 위다. 경기와 충청 지역을 아우르는 기호학파의 쌍벽으로 추앙을 받으면서 숙종 때 나란히 문묘에 배향됐다. 조선 때 문묘 배향 학자는 14명이다. 성혼과 이이 뒤 세대가 6명인데 모두 둘의 학통을 이은 학자들이다. “성혼과 이이의 제자들이 조선 중기 이후 정치를 주도했어요. 이런 중요성에 비해 성혼이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죠. 평전을 쓴 이유입니다.” 저자는 선조가 내린 벼슬을 수십차례나 사양하면서 학문 연마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는 ‘참선비’의 모습을 성혼에게서 본다. “당시 선비들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벼슬을 했어요. 자기 몸을 닦는 수기 다음에 치인이었죠. 성혼은 스스로 벼슬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관직을 받지 않았어요.” 그가 보기에 이이와 성혼의 시대는 “유교정치의 핵심룰인 언론 활성화”의 모범적 예이다. “율곡과 성혼이 임금에게 말하는 걸 보면 내 등에 땀이 날 정도죠. 선생이 초등생 앞에서 훈계를 하는 것 같아요. 임금은 속이 쓰리지만 신하의 간언을 칭찬해야 합니다. 간언을 감정적으로 배척하면 폭군 소리를 듣기 때문이죠.” 선조는 간언을 칭찬하지만 수용하지는 않는다. 조선 왕 가운데 소통의 내실이 좋았던 왕은 누굴까. “왕에 따라 개인차가 있어요. 어렵게 즉위한 왕이 소통을 잘하는 것 같아요. 세종이나 정조가 그런 경우죠. 세종은 셋째 아들이었고, 정조는 왕이 되기 전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입니다.” 소통 부재는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약점이기도 하다. “정도전이 종간여류(從諫如流)란 말을 했어요. ‘신하의 간언을 물 흐르듯 따라야 한다’는 의미죠. 이게 안 되면 둑이 터집니다.”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조선시대 언론 3사라 한다. “선비가 직언을 하도록 3사를 두었고 이들이 합동으로 대들면 왕도 살아남지 못했어요. 조선시대 언론의 힘이 지금보다 셌습니다.” 조선사를 전공한 한 교수의 학문적 화두는 ‘식민사관 극복’이다. “나이 들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에너지는 거기서(식민사관 극복) 나옵니다. 4·19 때 대학 4학년이었어요. 민족주의 열기를 불태운 첫 세대이죠. 주체성에 대한 갈망이 컸어요.” 그는 우선 조선은 사대와 당쟁, 신분차별로 망한 나라라는 식민사관의 도식을 깨고 싶었다. 첫 저술인 <정도전 사상의 연구>(1973)에서 정도전을 민본사상가로 추어올렸다. “제가 책을 쓰기 전에 정도전은 반역자와 사대주의자라는 부정적 이미지만 있었죠. 99년에 평전이 나온 뒤 정도전 붐이 불기도 했어요.” 한 교수는 이후 저술에서 조선의 유교정치가 공익과 공동체 정신에 터한 긍정적 자취를 부각했다. 정도전의 민본사상이 영조 이후 등장한 민국(백성의 나라) 사상으로 이어졌다거나 18세기 후반 이후 문과 급제자의 절반이 비양반 계층이었다는 논의가 그런 예이다. 우리 정신문화의 원류로 선비정신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당쟁도 긍정적으로 본다. “정치가 민주화되려면 당이 있어야 해요. 지방 선비까지 당인으로 조직하니 힘이 생깁니다. 이 힘으로 권력에 영향을 주는 것이죠. 요즘 정당 정치와 비슷해요. 다만 당이 다르면 다 배척하는 그런 극단적 사고가 문제이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학계가 내세운 민족사관을 수용했다. “학계가 불을 지른 민족사관을 박정희 정권이 산업화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수용했죠.” 그렇다면 식민사관은 이제 옛이야기가 됐을까? “학생들은 책을 통해 배우니 괜찮아요. 문제는 기성세대입니다. (내) 동창들과는 대화가 안 돼요. 선비가 다 조선을 말아먹었다고 생각하죠. 젊었을 때 입력된 게 평생 갑니다.” 그는 이른바 ‘뉴라이트 사관’을 두곤 이렇게 말했다. “뉴라이트는 이승만 박정희 이전의 역사를 무시합니다. 그래야 두 사람을 더 위대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역사허무주의적 시각이죠.” 한 교수는 스스로 ‘흙수저’라고 했다. “5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가난했죠. 대학 졸업 뒤엔 을유문화사(출판사)를 다니면서 대학원을 다녔어요. 당시 정진숙 사장의 배려가 있었죠.” 그는 평전을 쓸 때 유소년기를 중요하게 다룬다고 했다. 인생의 결정기라고 봐서다. “공부를 머리로만 한 게 아니라 가슴으로 했는지 봅니다. 머리로만 공부한 이들은 늘 거짓말을 하죠. 우상인 어머니가 별세한 뒤 머리를 깎고 출가한 율곡이나 외가가 서출이었던 정도전은 가슴으로 공부한 학자이죠.”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연재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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