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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정희진의 어떤 메모]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등록 2017-02-03 21:07수정 2017-02-03 21:12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김수영 전집 2 산문>, 김수영 지음, 민음사, 1981

유종호가 김수영을 말한다. “사회의 거부가 언어의 거부로 이어졌던 자유의 시인, 자기검열을 몰랐던 직선의 산문가.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서슴없고 가장 치열한 양심의 극(劇).” 시인은 양계장을 했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그도 첫 줄에 썼듯이 노동은 아내의 몫이었다. 그래도 지켜보지만은 않았는지 1964년에 쓴 산문 ‘養鷄 辨明’(양계 변명)은 어설픈 양계 전문가의 글이다(42~46쪽).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도둑이 들었다. 술에 취해서인지 추워서인지 얼굴이 “싯뻘건”(이하 모두 당시 표기) 오십쯤 되는 사내였다. 시인은 겁을 먹고 아내는 소리를 지른다. 가장이랍시고 시인은 위세를 보이려 하나 도둑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다.

“당신 뭐요?”, “여보 당신 어디 사는 사람이오? 이 밤중에 남의 집엔 무엇하러 들어왔오?”, “닭 훔치러 들어왔오?”, “이거 보세요, 이런 야밤에…” 도둑은 말이 없다가 “백번 죽여주십쇼, 잘못했습니다!”라고 빈다. 다시 시인의 “쑥스러운”(본인 표현) 질문이 이어진다. “집이 어디요?”, “우이동입니다”, “우이동 사는 사람이 왜 이리로 왔오?”, “모릅니다… 여기서 좀 잘 수가 없나요?” 이들의 동문서답, 아니 ‘덤 앤 더머’ 대화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도둑은 집을 나가기로 한다. 그러다 발길을 돌이켜 태연스럽게 묻는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도둑은 철조망을 넘어왔다. 시인의 생각은 이렇다. 사람이 보지 않을 때는 거리낌 없이 들어왔지만,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다시 철조망을 넘어갈 수는 없는 존재가 인간이란다. 인간이 그 정도 수준이라면 다행이다.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시인은 도둑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양계를 집어치우지 못하는 이유가 도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철조망을 넘어온 도둑(양계를 시작한 시인)은 그만두고 싶지만 그리고 본인이 넘어온 길을 알지만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를 물으며, 모르는 척 떼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양계변명이다.

내 해석은 다르다. “어디로 나가는 겁니까?” 이 구절을 접한 순간, 깔깔거리며 웃던 얼굴이 굳었다. 출구 없는 삶의 서러움과 답답함에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1981년판, 낡고 먼지 나는 책은 물기를 감당하지 못한다.

나야말로 간절히 묻고 싶다. 어디로 나가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당장 오늘 무엇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렵습니다. 저는 아직도 진로를 정하지 못했습니다. 페미니즘은 너무 어렵고요, 공부도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토란 같은 구근(球根)류 전문 카레 집을 할까요, 헌 옷 수선집이 좋을까요, 운전을 배워 트럭을 몰며 거리에 버려진 가구를 모을까요?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사방이 꽉 막힌 인생. 누가 나를 인생에 가둬놓은 것입니까. 도대체 어디로 나가야 하는 겁니까? 사실은 사라지고 싶습니다. 그게 유일한 출구잖아요.

더 이상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 다 썩었는데 나만 청정하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사기당하는 데 이력이 났다. 돈, 시간, 사람 잃기를 반복한다. 잘난 척하다, 순진함과 진정성을 구분 못해서, 일방적이어서, 준비되지 않은 정의감 때문에, 멍청해서… 그러다 분노가 폭발, 모든 것을 망치기 일쑤다. 며칠 전 밤 11시 넘어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잤다. 아침에 보니 문 앞에 택배가 놓여 있었다. 연휴에. 사는 게 오로지 노동이구나.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유관순, 윤동주까지 갈 것도 없고 김수영 47년, 나쓰메 소세키 49년, 김현 48년, 내가 좋아하는 배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 47년을 살았다. 그들과 비교할 일은 없다. 하지만 “나이만 먹는다”는 괴로움은 떨칠 수 없다.

다행히 우주의 관점이라는 게 있다. 그렇지, 나는 모래알의 백만분의 일보다 작은 먼지다. 어디로 나가긴? 일단, 이부자리에서 나가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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