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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슬로베니아에서 온 괴짜 작가의 ‘골때리는’ 소설

등록 2017-02-09 19:35수정 2017-02-09 20:12

강병융 소설집 ‘여러분, 이거 다…’
기사문 252개 짜깁기한 단편과
친구 백가흠, 도데 소설 패러디 등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강병융 지음/한겨레출판·1만3000원

낯선 나라에서 낯선 소설이 도착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는 한국 작가가 한국어로 쓴 소설집이지만, 지은이 강병융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학 아시아학과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친다. ‘그리지 못해 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점·선·면·형·형태에 대해 쓴 연작 다섯, 알퐁스 도데와 백가흠 소설을 패러디한 두 단편 그리고 책 표지 이미지가 강력하게 환기시키는, 쥐를 닮은 누군가를 겨냥한 독한 소설 둘까지 책에 묶인 아홉 단편 역시 낯설고 기이하기는 마찬가지다.

단편 ‘우라까이’는 수록작 가운데서도 가장 실험성이 강한 작품이다. 제목은 ‘남의 기사를 베끼고 살짝 비틀어서 제 기사처럼 쓰는 관행’을 일컫는 언론계 은어. 이 작품에서 작가는 2008년 2월25일부터 2013년 2월25일까지 기사 252개를 오려 붙이는 것만으로 단편소설 하나를 완성해 보인다. 기사들이 작성된 시기에서 짐작되듯이, 해당 기간 청와대 주인이었던 이의 행적을 교만·시기·분노·나태·탐욕·식탐·색욕 일곱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차례로 <오마이뉴스>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겨레> <아시아경제>의 기사를 합성한 소설 마지막 대목은 이러하다.

“그놈의 쥐는 광우병 의심 증상으로 사망했다. 거대한 쥐를 품은 닭은 이렇게 말했다. ‘병 걸리셨어요?’”

표제작 역시 25개 기사를 각주로 동원했지만 ‘우라까이’처럼 소설 전체를 따붙이기 방식으로 쓴 것은 아니다. 대신 풍자의 강도는 한결 세졌다. 소설은 주부의 메모식 일기와 ‘인간과 쥐’가 등장하는 3인칭 서술이 갈마들면서 전개된다. 주부의 일기에서 남편은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에 나갔다가 물대포에 눈을 맞아 실명하고, 철거민인 친정아버지는 불타는 용산 남일당 옥상에서 뛰어내려 중태에 빠지며, 어린 딸은 광우병에 걸려 역시 죽음을 앞두게 된다. 불행이 닥치는 순간마다 기분 나쁜 눈빛을 지닌 쥐와 맞닥뜨리던 주부는 “쥐를 잡아 가죽을 다 벗기고, 토막을 내서, 살을 발라버리겠다고 다짐”한다.

패러디와 정치 알레고리가 승한 소설집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를 낸 작가 강병융. “슬라보이 지제크를 좋아해서 그가 재직하는 류블랴나대학에 취직했는데, 4년이 가깝도록 정작 지제크의 얼굴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패러디와 정치 알레고리가 승한 소설집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를 낸 작가 강병융. “슬라보이 지제크를 좋아해서 그가 재직하는 류블랴나대학에 취직했는데, 4년이 가깝도록 정작 지제크의 얼굴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3인칭 서술 부분은 바로 그 주부가 쥐를 납치해서 지하실로 데려가 다짐을 실행에 옮기는 이야기다. 껍질을 벗기는 박피기와 뼈를 자르는 골절기, 육질을 부드럽게 하는 연육 망치, 고기를 잘게 자르는 슬라이서 같은 정육용 도구를 이용해 쥐를 고기로 만드는 과정은 잔혹 영화처럼 세밀하게 묘사된다. 주부의 잔인한 복수극을 초래한 불행들에서도 짐작되지만, “세상 모든 일을 다 해봤다던 쥐” “누군가가 이 거대한 강을 녹차로 만들어 홀랑 다 마시려고 작정한 것 같았습니다” 같은 대목은 이 소설의 정치적 알레고리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현실적인 응징까지는 아니더라도 통쾌한 상상은 해 보자는 생각에서 쓴 소설이에요. 권선징악이라는 고전적 주제를 담았지만, 형식에서는 저에게 익숙한 패러디를 통해 차별성을 주려 했습니다. 저는 블랙리스트에도 오르지 않은 ‘좋은’ 작가입니다만,(웃음) 이 소설을 쓰면서는 조금 겁이 나기도 해서 피해 나갈 구멍 삼아 이런 제목을 붙였어요.”

책 출간에 맞추어 일시 귀국해 7일 오후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작가는 “소설 작업을 위해 인터넷 기사 검색을 하면서 이분이 생각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며 “그런데 이분 뒤에 이분보다 더 나쁜 분이 올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한편 ‘귀뚜라미 보일러가 온다’는 작가의 대학 동기인 백가흠의 소설 <귀뚜라미가 온다> 등을 패러디한 작품이고, ‘빙글빙글 돌고-알퐁스 도데를 위한 ‘웃픈’ 오마주’는 도데의 단편 ‘별’을 비틀어 쓴 작품이다. 작가는 “진지한 건 삶에 별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웃기고 재미있지만 다 읽고 나면 진지해지는, 에스엔엘(SNL)이나 김어준 스타일의 소설을 쓰려 한다”고 말했다.

작가는 명지대 문창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현대 러시아문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13년 4월부터 류블랴나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빅토르 최의 노래 제목을 소설과 장 제목들로 삼은 <알루미늄 오이>, 기사문과 사전 항목, 그림 등을 재편집해서 한 인물의 삶을 구축한 ,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기괴한 인물들을 등장시킨 <상상인간 이야기> 같은 독특한 소설들과 류블랴나 기행 에세이 <아내를 닮은 도시> 등의 책을 낸 바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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