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 지음/푸른역사·2만원
먼 옛날 옛적을 뜻하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는 말은 생태환경사에 대한 우리의 척박한 인식을 보여준다. 작은 실증을 해보자. 담배는 임진왜란 전후에 수입됐다. 아득한 시절이라고 생각했는데, 기껏해야 400년 전인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동물은 민담이나 민속학에서 다뤄졌지, 생태적 이해와 문헌 통계에 기반을 둔 실증적 연구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지은이인 김동진(50) 박사는 한국 생태환경사 연구를 개척해 온 인물이다. 이 분야 최초의 저작이라고 할 만한 <조선 전기 포호정책 연구>(2009) 등 그의 호랑이 연구는 ‘일제의 해수구제로 호랑이가 하루아침에 멸종했다’는 우리의 선입견을 깨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온 호랑이 출현 기록을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조선시대 들어 성리학과 농본주의의 이념적 토대에서 농지 개간이 확대됐다. 호랑이는 서식지에서 밀려나고 있었고, 인간과 충돌해 호환을 일으켰다. 조선 조정은 호랑이 잡는 대규모 행정·군사조직을 두었다. 성종 때만 해도 호랑이 포획 전문군사인 착호갑사가 440명, 착호인이 1만명에 이르렀다. 대체로 4000~6000마리 살던 호랑이와 표범 개체수는 농지개간과 솎아내기로 점차 줄어들어 조선 말기에 이르러 남한에서는 희귀해지게 된다. 호랑이는 지금으로 치자면 ‘멧돼지 신세’였다. 도시화로 쫓겨나 가끔 출몰해 난동을 일으키는 골칫덩어리.
조선시대 농경지 확대는 농우 중시 정책으로 이어졌다. 공장식 축산이 일반화된 현재의 3분의 1 수준인 100만 마리의 소가 조선 후기에 사육됐다.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논갈이’. 푸른역사 제공
이 책은 호랑이에서 시작해 사슴, 소, 말 등 동물, 농지와 숲, 그리고 미생물과 전염병을 차례로 다루며 인간과 환경이 주고받은 변화를 살펴보고 있다. 기존 인간 중심의 역사를 벗어나 인간과 비인간들의 관계를 조명했다.
농지개간으로 고통을 받은 것은 호랑이뿐만이 아니었다. 사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군사훈련은 사슴을 몰이사냥 하면서 진행됐는데(국왕이 활솜씨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사슴이 있어서다), 사슴은 서식지 축소와 군사훈련에 겹겹이 포위된 상황이었다. 지금은 찾아볼 길 없는 순록류의 ‘대록’(큰사슴)은 16세기에 이르러 개마고원 일원을 제외한 지역에서 희귀해졌다. 꽃사슴도 17세기 이후 번번이 발생한 우역으로 개체 수를 회복하지 못한다.
농업 경제의 발전은 소의 급증도 불러왔다. 조선의 소는 힘세고 일을 잘했다. 세조 7년 오키나와에서 들여온 물소와 교배를 하면서 품종이 개량된 것이다. 성종, 연산군 등은 물소를 각 고을에 나눠주면서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정책을 폈다. 조선 초기 소의 사육 두수는 3만 마리에서, 18세기 후반 100만 마리로 늘어났다. 조선 후기엔 대략 100만 마리 선이 유지됐을 거라는 게 저자의 계산이다. 육식과 우유 섭취가 일반화된 요즈음 334만 마리를 키우는 것(2013년 통계청 자료)과 비교하면, 절대 적지 않은 수다. 조선 초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인구는 4~5배가량 늘었을 뿐이지만, 소의 사육 두수는 30~40배 늘어났다.
공장식 축산 시대에 한 해 걸러 구제역이 발생하는 것처럼, 조선에서도 우역은 골칫덩어리였다. 숙종 2년(1676년)에는 하루에 도살하는 소가 1000마리 이상이라는 기록이 있고, 1663~71년 유행한 우역 때는 7만4424마리가 도축됐다. 바이러스는 소와 사람을 숙주 삼아 돌아다녔다. 천연두와 홍역은 소에게 가볍게 발병했지만, 사람은 심하게 병을 앓았다. 소의 개체 수가 많이 증가한 17세기 이후에 천연두 발병이 늘어난 점은 특기할 만하다. 수인성전염병인 이질도 유행했다. 하천 변의 넓은 땅이 일종의 늪지인 논으로 개간되면서 미생물이 살기에 적합한 생태계가 된 것이다.
근대 사회의 특성이 기계의 발명과 도시화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이를테면 영미권의 마르크스주의 생태사학자들은 근대에 이르러 동물이 ‘자원’으로 인식되면서 착취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북극해에서 잡혀 추출된 고래의 기름은 밤 공장의 불을 밝혀 자본주의에 기여했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주요 도시에는 약 3500만 마리의 말과 노새가 교통수단으로 동원돼 산업화의 실핏줄이 됐다.
인간과 동물, 자연과의 관계는 조선 시대에 특기할 만한 변화를 겪었다. 인간은 경작지를 확대해나갔고, 자연은 호환이나 전염병으로 역습했다. 생태사 연구는 앞으로 거시적인 틀에서 조선 사회의 정체성을 논하는 데도 한몫 할 것이다. 김동진 박사는 16일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그리고 각종 문집 등 방대한 자료를 생각하면, 조선 생태사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말했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