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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페미니즘은 기억이다, 기록이다

등록 2017-03-02 19:27수정 2017-03-02 20:30

‘역사적 기억상실’ 맞선 기록투쟁 2권
‘페미니스트 아이콘’ 스타이넘 회고록
60~70년대 급진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
길 위의 인생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고정아 옮김/학고재·2만원

나쁜여자 전성시대-급진 페미니즘의 오래된 현재, 1967~1975
앨리스 에콜스 지음, 유강은 옮김/이매진·2만7000원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가 쓴 회고록이라기엔 민망하게도, 아버지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1934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태어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장기간 가족 여행을 일삼는 천하태평 아버지, 꿈이 있었지만 결혼 뒤 가정에 머물러 우울증에 시달린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길 위의 인생>(My Life on the Road, 2015)에서 스타이넘은 스스로를 ‘방랑하는 조직가’라 표현했다.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은 그는 평생을 떠돌았다. 특히 22살 때 한 인도 여행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당시 스타이넘은 간디주의자들과 함께 여러 지역의 회합에 참여했다. 마을 사람들은 빈손으로 온 손님들을 환대했고, “이야기 모임”을 열면서 “증언의 물결”을 이어갔다.

1978년 한 회의에 참석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왼쪽부터), 알리 스코트, 로빈 모건, 케이트 밀레트, 진 오리어리. 이매진 제공
1978년 한 회의에 참석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왼쪽부터), 알리 스코트, 로빈 모건, 케이트 밀레트, 진 오리어리. 이매진 제공
그 뒤 스타이넘은 ‘길 위의 모임’을 조직하는 데 인생 대부분을 바쳤다. 어쩌면 운이 좋게 태어나, 역사의 한가운데에 뛰어들 수 있었다. 1963년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면서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연설하는 장면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목격했다. 길 위에서 페미니즘을 배웠고 전국의 대학에서 연설했으며 기록적인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를 창간했다.

책은 ‘길’이라는 테마를 두고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인 일화를 연결시킨다. 페미니스트 조직가로서, 민주당 지지자로서 벌인 정치적 운동은 기본이고 1960~70년대 반전운동과 시민권 운동의 역사에서 숨은 여성 영웅들의 에피소드가 겹쳐 유장하게 흘러간다. “억압의 뿌리는 기억의 상실”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그는 말한다. “페미니즘은 기억이다.” 팔순이 넘어 이 책을 쓴 이유도 그와 같을 것이다.

발간 직후 미국에서 큰 화제를 몰고 온 이 책에서 스타이넘은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언론의 혐오, 자신이 클린턴을 지지하며 받았던 맹렬한 공격도 해명한다.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비판받았던 억울함, 페미니스트 집단 속에서 겪은 갈등도 소환한다. 그러나 2000년부터 3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던 남편 이야기나 과거 정치적 스캔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1967년 한 잡지를 통해 스타이넘이 설립을 도운 대학생 그룹에 미국 중앙정보국의 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금지원 사실을 인정했지만, 알려진 것처럼 정보 수집 활동을 부탁받은 적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1967년부터 1975년까지, 짧고도 굵었던 미국의 급진 페미니즘 운동사를 다룬 <나쁜여자 전성시대>는 이 사건을 소상히 다룬다. 1975년, 스타이넘이 중앙정보국의 위장집단에 관여했다고 비난하는 보도자료를 낸 급진 페미니스트 그룹 ‘레드스타킹스’는 <미즈>가 가진 자유주의 성향, 상업적 지향을 비판했고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페미니즘과 국가의 관계에서 중요한 쟁점을 제기한 레드스타킹스의 통렬한 비판은 그러나 차츰 인신공격적이라고 인식되었고, 사람들은 스타이넘에게 더 많은 공감을 보내기 시작했다.

1967년 출발한 미국의 급진 페미니즘은 좌파 운동권이나 ‘블랙 파워’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 그룹 사이에서 분출된 ‘차이의 정치학’ 속에서도 극렬한 분열을 일으켰다. <나쁜여자 전성시대>는 이렇게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급속하게 소멸한 급진 페미니즘의 강렬한 역사를 탁월하게 재현한 보기 드문 책이다. 지은이는 급진 페미니즘이 “성계급 체계를 제거하는 데 전념하는 정치 운동”인 반면, 이를 대체한 문화 페미니즘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문화적 가치 위계를 전복하려는 반문화적 운동이었다고 본다. 급진 페미니스트가 “젠더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려 한 전형적인 사회 구성주의자”였다면, 문화 페미니스트는 “여성성을 찬미하려 한 본질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인종과 계급보다 ‘젠더’에 특권을 부여하고 여성을 단일한 범주라고 여겼지만 이는 “좌파가 젠더를 ‘부차적 모순’으로 간단히 처리한 데 맞선 반발”이었다. 이들은 조건 없는 낙태권을 주장하고, 브래지어를 벗어던지거나 미스아메리카 대회를 ‘폭파’하겠다며 윽박지르는 등 여성 대상화에 강력히 저항했다. 후대 페미니즘 가운데 그들에게 빚지지 않는 운동은 없다고 할 정도.

1972년 5월 뉴욕에서 연 낙태 재범죄화 반대 집회. 이매진 제공
1972년 5월 뉴욕에서 연 낙태 재범죄화 반대 집회. 이매진 제공
그러나 그들의 정치담론은 자취가 없고, 투쟁은 기억되지 않았다. 지은이가 이 첨예한 갈등의 연대기를 남긴 것은 ‘역사적 기억상실’에 맞서 사실을 남기려는 ‘기록 투쟁’으로 보인다. 방대한 자료조사(1300개의 각주)를 바탕으로 복원된 역사는 ‘잃어버린 고리’를 찾은 듯한 느낌마저 준다. 544쪽짜리 두꺼운 한국판은 옮긴이 유강은의 사려깊은 번역과 해설자 엄혜진의 깊은 통찰을 만나 책의 가치를 한층 높였다.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나’는 말을 거듭하는 ‘자칭 진보’나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증후군’에 시달리는 이들의 필독서로 손색없다.

해설자의 지적처럼, 이 책은 한국 독자에게 기시감을 줄지언정 이곳의 역사가 아니다. 기억과 기록이 ‘지금 여기’서도 새롭게 이뤄져야 한다는 자극을 제공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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