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 초판 표지. 영국인 주인과 프랑스인 하인이 짝을 이뤄 세계를 돌아다니며 흥미로운 사건을 잇달아 경험하는 로드무비 형식의 작품이다. 위기피디아
“설마 지구가 줄어들기라도 했단 말인가요?”
“100년 전에 비하면 열 배는 빠른 시간에 지구를 돌 수 있으니, 지구가 줄어든 셈 아닙니까?”
1872년 가을. 영국 런던 중심가 상류층 사교모임 ‘개혁클럽’의 객실에선 회원들 사이에 사소한 논쟁이 붙었다. 얼마 전 영국은행에서 발생한 5만5천파운드 도난사건이 발단이 됐다. 오리무중인 도둑의 행방을 놓고, 도둑이 이미 먼 나라로 손쉽게 도망쳤을 것이라는 쪽과 도둑을 뒤쫓아가 잡아오기도 예전보다 훨씬 쉬워지지 않았냐는 쪽으로 갈렸다. “아무리 세계일주를 하는 데 세 달밖에 안 걸린다고는 하지만….” 이 와중에 누군가 못 미덥다는 듯 툭 던지자, 한 신사가 정색하며 되받았다. “80일이면 됩니다.”
필리어스 포그의 엉뚱한 세계일주여행은 이렇게 시작됐다. 개혁클럽 내에서도 도무지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 포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집과 개혁클럽을 시계처럼 오가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세계지리에 더없이 정통했고 머릿속으로는 세상 안 가본 데가 없는 괴짜였다. “원하신다면 내기를 하죠. 2만파운드를 기꺼이 걸겠습니다.” 포그는 다짜고짜 내기를 제안했다. 전 재산의 절반을 판돈으로 내걸고 정확히 80일 안에 지구를 직접 한바퀴 돌겠다는 얘기였다. 나머지 재산 절반은 여행경비로 쓰기로 했다. 출발은? “오늘 당장 떠나죠!” 1872년 10월2일 저녁 8시45분, 포그는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프랑스인 하인 파스파르투를 데리고 런던발 파리행 기차 일등석에 태연히 몸을 실었다. 80일 뒤, 그러니까 12월21일 저녁 8시45분. 포그가 개혁클럽 객실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약속시간이다.
여행 52일째 경도 180도 자오선 지나
프랑스 작가 쥘 베른의 대표작 <80일간의 세계일주>(1873년)는 1872년 10~12월을 배경으로 영국인 주인(포그)과 프랑스인 하인(파스파르투)이 짝을 이뤄 세계를 돌아다니며 흥미로운 사건을 잇달아 경험하는,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을 띤 작품이다. 프랑스 낭트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난 쥘 베른의 인생이 크게 바뀐 건 스무살이 되던 해인 1848년이다. 그의 부모는 법조인이 돼 안정적인 삶을 누리라며 아들을 파리로 떠나보냈으나, 스무살 청년의 눈에 비친 당시 파리의 모습은 자유와 혁명의 열기로 들끓는 용광로 같았다. 이때부터 모험심과 방랑벽이 쥘 베른의 가슴속에 타올랐다. <기구를 타고 5주간>(1863년), <지구 속 여행>(1864년), <지구에서 달까지>(1865년)의 잇단 흥행 성공은 그를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이후 쥘 베른은 <해저 2만리>(1870년)와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선보인 데 이어 우리에겐 <15소년 표류기>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2년간의 휴가>(1888년) 등 모두 8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지금부터 약 150년 전 런던에 살고 있던 포그는 왜 지구를 한바퀴 도는 데 80일이면 너끈하다고 장담했을까? 런던이 위치한 북위 50도선을 따라 평행하게 최단거리(1만9300㎞)로 지구를 한바퀴 도는 여정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교통수단이라곤 증기선과 증기기차뿐이던 당시 형편을 고려하면 결코 만만치 않은 도전이었을 텐데. 비밀을 풀어줄 열쇠는 포그가 세계일주여행에 나서기 2~3년 전에 벌어진 세 가지 획기적 ‘사건’이다. 이 무렵 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 대륙에선 약속이나 한 듯 대공사가 잇따라 마무리됐다. 미국 (제1차) 대륙횡단철도와 수에즈운하 개통(1869년), 인도반도철도 전 구간 완공(1870년)이 그것이다.
1869년 5월8일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북쪽의 프로먼토리서밋에서 대륙횡단철도 마지막 연결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장면을 그린 화보. 대륙횡단철도의 개통으로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7일 안에 도착할 수 있게 됐다. 위키피디아
런던을 출발한 포그 일행이 증기선 몽골리아호에 옮겨 타고 수에즈운하를 통과하기까지 단 7일이 걸렸다. 수에즈에 잠시 머물며 석탄을 추가로 보충하느라 쓴 4시간을 빼곤 곧장 홍해가 눈앞에 펼쳐졌다. 영국인들이란 원래 지나가는 도시를 구경하는 일조차 하인에게 대신 시키는 사람이라도 되는 양, 포그는 묵묵히 일정표에 표시만 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몽골리아호가 인도양을 거쳐 인도 서쪽 뭄바이(봄베이)에 다다른 건 20일이 지났을 때다. 이제 반대편 동쪽 끝 캘커타(콜카타)까지 기차로 사흘이면 족했다. 하지만 도중에 철로가 끊어져 코끼리 등에 올라 이동하고, 밀림을 지날 땐 전통풍습대로 죽은 남편을 따라 화장당할 처지에 놓인 아우다 부인을 구출하는 등 갖가지 에피소드가 이어지는데…. 우여곡절 끝에 포그를 태운 제너럴그랜트호는 요코하마를 떠난 지 9일째, 그러니까 전체 일정 중 52일이 지난 11월23일, 경도 180도 자오선을 통과했다. 뒤이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포그는 지체 없이 뉴욕행 기차에 올라탔다. 그는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원의 둘레를 따라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포그 일행은 일정표상 마지막날(12월21일) 정오를 20분 남긴 시각에 영국 땅(리버풀항)에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마침내 런던. 포그 일행이 런던역에 도착했을 때, 아쉽게도 모든 시계는 이미 저녁 8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수에즈운하·인도반도철도·대륙횡단철도. 포그 일행이 차례로 거쳐간 인류 대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이 셋의 진면목은 각각 프랑스·영국·미국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편의 동시간대 경쟁 드라마로 바라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수에즈운하부터.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운하 건설공사가 시작된 건 1859년. 수에즈운하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신경전으로 점철됐다. 19세기 초 이집트에 진출한 나폴레옹은 영국의 인도 무역을 방해하고자 이곳에 사막을 가르는 운하 건설을 꿈꿨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의 불완전한 측정기술로는 지중해와 홍해의 수심차가 10미터 난다는 (잘못된)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수에즈운하의 영웅’ 페르디낭 드 레셉스는 1858년 만국수에즈해양운하회사를 만들어 건설에 착수했다. 유럽의 돈줄을 쥔 로스차일드은행이 건설자금을 대는 대가로 높은 수수료를 요구하자, 프랑스에선 소액투자자 2만5천명이 2억프랑의 자금을 모으는, 때아닌 ‘애국투자’ 열풍이 불기도 했다. 10년의 건설기간 동안 연인원 150만명의 이집트 노동력이 투입됐는데, 이를 두고 영국은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며 국제사회 여론몰이에 나서는 등 끝까지 프랑스를 견제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뱃길이 뚫림에 따라, 아프리카 최남단을 돌아야 했던 북대서양-인도양 항로는 무려 7000㎞ 이상 줄어들었다. 인류 역사로 보자면 커다란 진전이겠으나, 아프리카 대륙을 노리는 유럽 제국주의의 발걸음을 한층 재촉한 것 또한 분명하다.
1873년 쥘 베른이 출간한 여행기 형식
80일 안에 지구 한바퀴 도는 내기 소재
수에즈운하·인도반도철도 통과하고
대륙횡단철도 이용해 런던에 되돌아와
영국·프랑스·미국의 패권 다툼의 상징
인도 약탈과 아프리카 식민화에 버팀목
미국 남북전쟁 뒤 ‘재건 프로젝트’ 의미
1873년 최초의 글로벌 불황 원인 되기도
필리어스 포그의 세계일주여행 노선. 런던을 떠나 수에즈운하를 지난 뒤 인도반도를 철도로 통과하고, 태평양을 배로 건넌 다음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는 대륙횡단철도를 이용한 뒤,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해가 뜨는 동쪽 방향으로 이동했기에 전체 일정을 하루 단축할 수 있었다. 위키피디아
1분에 25미터 철로 놓은 속도경쟁
인도반도철도야말로 영국의 이해관계와 떼려야 뗄 수 없다. 공업제품을 수출하고 식료품과 원료를 수입하는 영국의 식민지무역 구조의 본보기 무대는 단연 인도다. 영국은 자국산 면제품을 인도 전역에 물밀듯이 쏟아부어 인도의 전통적 면직업 기반을 무너뜨리는 대신, 원료와 식료품을 거침없이 쓸어갔다. 1840년대 후반부터 이미 영국이 인도에 철로를 까는 데 뛰어든 이유다. 게다가 인도 땅에 철도를 건설하는 일이 새로운 고수익 투자처를 찾던 당시 영국 투자가에겐 매력적이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서쪽(뭄바이)과 동쪽(캘커타) 양편에서 단계적으로 깔리기 시작한 철로망이 완전히 연결된 건 1870년. 뭄바이와 캘커타(수도) 사이를 사흘 안에 달리는 2127㎞ 길이의 인도반도철도는 모든 게 영국식 그 자체였다. 영국산 석탄을 태워 달리는 영국제 기관차는 영국인 기관사가 몰았다. 철로 위를 분주히 오간 건 영국산 면제품(수입)과 인도 대농장에서 재배된 커피·육두구·정황·적후추(수출), 그리고 영국인 식민행정관료와 군 장교들이었다. 인도반도철도의 존재 이유였다.
미국 대륙횡단철도 건설 역시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1850년을 기준으로 미국의 철도 총연장은 이미 1만4500㎞나 됐다. 내륙의 미주리강 근처까지는 철도망이 촘촘하게 들어섰다. 미국 철도 역사의 분수령은 남북전쟁(1861~1865년). 전쟁의 상처를 씻고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대륙횡단철도 건설은 더없이 좋은 ‘재건·화합 프로젝트’였다. 남북으로 갈려 서로를 겨누던 총부리는 이제 동서로 뻗은 철도 건설현장의 망치로, 전쟁터에서 만난 어제의 적은 건설현장에서 땀 흘리는 오늘의 동료로 탈바꿈했다. 물론 대륙횡단철도 건설의 기점을 어디로 할지를 두고선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격론 끝에 중부 네브래스카의 오마하가 최종 낙점됐다. 오마하 동쪽으론 이미 뉴욕까지 여러 갈래의 철로망이 깔려 있으므로, 오마하에서 서쪽 끝까지 새로 철로를 건설하면 될 일이었다.
쥘 베른은 <80일간의 세계일주> 이외에도 <해저 2만리> <2년간의 휴가> 등 8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는 당대 선진 과학기술에도 깊은 조예를 보여,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위키피디아
새크라멘토(캘리포니아)에서 오마하에 이르는 신규 노선 공사는 두 회사가 나눠 맡았다. 센트럴퍼시픽이 새크라멘토에서 동쪽으로, 유니언퍼시픽이 오마하에서 서쪽으로 각각 철로를 깔기로 했다. 재미있는 건 세부노선을 미리 확정·할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정부는 지형 난이도에 따라 1마일(1.6㎞)당 1만6천~4만8천달러를 차등지급하고 1마일당 선로와 평행한 25㎢ 면적의 공유지를 덤으로 제공하겠노라 약속했다. 속도경쟁이 벌어진 건 당연했다. 마주 보고 누가 더 빨리, 더 멀리 철로를 까느냐에 따라 두 회사의 수익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공사 막판 두 회사는 하루 노동에 나흘치 일당을 줘가며 작업을 독려했다. 12시간에 철로 16㎞를 깔았다는 기록도 있다. 얼추 1분에 25미터꼴이다! 웃지 못할 일도 많았다. 공사는 맨 선두가 한참 앞서 터를 다지고 작업조가 뒤따라 오며 철로를 깔면 후방조는 전날 깐 철로 위로 당일 작업 자재를 공수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그러다 보니, 한때 두 회사의 땅 고르는 작업조가 200㎞ 이상을 서로 평행하게 지나친 적도 있다.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북쪽의 프로먼토리서밋을 두 회사의 철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최종 결정하고 나서야 이런 해프닝도 사라졌다. 험준한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뚫던 숱한 인부들의 희생을 뒤로하고, 1869년 5월8일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장장 6093㎞의 철길이 마침내 열렸다. 남미대륙 남단을 돌거나, 파나마 지협을 거치던 최장 6개월의 여정은 이제 단 7일로 단축됐다.(※1930년대 부산에서 출발해 만주철도와 시베리아철도를 거쳐 파리까지 가는 데 14일이 걸렸다.) 대서양과 태평양이 철길로 잇닿던 순간, 미국은 후발 산업국가로 우뚝 설 채비를 끝마쳤다.
영국·프랑스에서 미국으로 패권 이동
1869~1870년의 세 가지 대역사가 미친 영향은?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던 각국은 뒤질세라 사막을 파헤쳐 뱃길을 내고 산맥을 깎아 철길을 이었다. 새로 뚫린 뱃길과 철길을 따라 물자와 사람이 분주히 오갔고 경제적 기회는 확대됐다. 하지만 단기적으론 세계경제에 외려 깊은 상처만 안겨줬다. 왜일까? <80일간의 세계일주>가 세상에 나온 1873년. 오스트리아 빈의 증권거래소가 갑자기 파산했다. 위기는 지체 없이 다른 나라로 전염됐다. 역사상 최초의 글로벌 불황으로 기록된 ‘1873년 대불황’의 서막이다. 뜻밖에도 인프라 투자, 특히 철도 건설이 빌미가 됐다.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된 1869년에서 1873년 사이 미국의 철도 총연장은 50%나 급증했다. 유럽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너도나도 뛰어든 철도 건설 투자 열풍은 부실대출 우려를 키워 각국 금융기관을 속속 집어삼켰고, 철강산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글로벌 불황은 대규모 실업으로, 다시 구매력 부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
대륙횡단철도 건설공사에는 중국 이주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부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 때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 노동자들은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절벽에 맨몸으로 매달려 폭파작업을 진행하는 등 위험한 작업에 집중적으로 투입됐다. 위키피디아
한가지 덧붙이자면, 프랑스 작가가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쓴 <80일간의 세계일주>엔 당시 패권 다툼의 미묘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장치가 적잖다. 대부분 포그가 내기에 질 것이라 예상할 때, 중풍 걸린 한 영국 노인은 포그를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혹시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영국인이 가장 먼저 하는 게 좋지 않겠소.” 예의 바르고 냉정하며, 심지어 ‘과학적’인 포그(영국)의 이미지는 작품 끝자락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포그는 약속시간에 늦어 결국 내기에 졌다고 생각했으나, 실은 24시간 먼저, 그러니까 12월20일에 도착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해가 뜨는 쪽으로 세계일주에 나섰기에 경도 1도를 지날 때마다 하루가 4분씩 짧아진 것을, 빈틈없는(!) 그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이 차고 있던 시계를 현지시각에 맞게 계속 조정하라는 충고에 프랑스인 파스파르투는 “그래 봐야 태양이 손해죠. 틀린 쪽은 태양이니까”라며 단칼에 무시했다. 냉정하고 과학적인 영국도 자존심과 감정에나 사로잡힌 프랑스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소심한 복수? 조롱? 아니나 다를까. 1873년 대불황을 거치며 세계경제의 패권은 영국과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었다. “조금 흔들리더라도 빨리 달리는 배를 만드는”, 실용적인 나라로.
최우성 토요판 에디터. 평소 경제와 역사를 한묶음으로 바라보려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일까. 우연히 다시 읽어본 어릴 적 동화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대표적 동화들을 추려, 동화가 탄생한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펴보고 당대의 주요 사건을 곁들여 새롭게 읽어보려 한다. 어쩌면 어른의 동화읽기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