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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빅토리아 시대 여성이 남긴 ‘생생한 동남아시아’

등록 2017-03-16 19:25수정 2017-03-16 19:33

이사벨라 버드 비숍 1883년 여행기
1870년대 일본에서 말레이까지
‘황금반도’ 자연·문화 깊은 애정
말레이 반도 페락에서 처음으로 코끼리를 탄 이사벨라 버드 비숍. 경북대학교 출판부 제공
말레이 반도 페락에서 처음으로 코끼리를 탄 이사벨라 버드 비숍. 경북대학교 출판부 제공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황금 반도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유병선 옮김/경북대학교 출판부·2만5000원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의 세계일주를 그린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나온 해가 1873년이다. 이 때만 해도 이 소설은 에스에프(SF)로 분류됐다. 짧은 기간 안의 세계일주란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과제였다. 그러나 기간이 문제였을 뿐, 세계 여행 자체는 재력과 체력, 소망을 갖춘 이라면 현실로 꿈꿔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이미 영국은 오대양 육대주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식민제국을 건설해놓고 이를 근대적 교통 수단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의 절반에겐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여성의 순종을 미덕으로 삼던 ‘빅토리아 시대’라는 시간적 배경이다. 지구촌을 누빈다는 것은 소수 선택된 남성의 몫이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에 우리의 눈길이 머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150여년 전 보호자나 배우자 없이 여성 홀로 세계 곳곳에 발자취를 새긴 것은 서구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과감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버드는 20~30대였던 1850~1860년대 미국과 호주 등지에 머물며 여행가이자 작가로서의 잠재력을 확인한 뒤, 1870년대 후반 기어이 일본에서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동아시아 기획 탐사에 나선다. 특히 1878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2월25일까지 두 달여에 걸쳐 홍콩, 광저우 등을 지나, 말레이 반도 서안의 말레이 왕국에 이르는 동남아시아 일대를 돌아본다. 그는 이 여행의 결과물을 1883년 <황금반도와 그쪽으로 가는 길>이라는 여행서로 내놓는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황금반도>(<황금반도>)는 그 책의 첫 국내 번역서다.

이후 버드는 고국에서 5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남편과 사별한 뒤 쉰여덟 나이로 티베트에서 한반도와 중국까지 본격적 동아시아 탐사에 나선다. 이 시기 쓴 책의 하나가 잘 알려진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다. 버드는 1901년 70살 때 모로코를 경유하는 1000마일 탐사에 나서는 등 평생 세계를 떠도는 삶을 살았다. 15권의 책을 썼고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에 올랐다.

말레이 반도 페락 강의 말레이식 통나무배.
말레이 반도 페락 강의 말레이식 통나무배.
<황금반도>는 여행작가로서 버드의 이름을 널리 알린 책으로 꼽힌다. 마흔일곱 때다. 애초 영국으로 돌아가려던 그는 홍콩과 광저우 등을 들른 뒤, 황금반도를 꼭 가보라는 추천을 받는다. 주저없이, 사전준비도 없이 미답의 길로 나선다. 여행가의 피, 역마의 살이 그를 열대의 정글로 이끌었을 터이다. 그는 여행 단상과 감흥을 영국의 동생에게 장문의 편지로 실어보낸다. 귀국한 뒤 이를 엮어 펴낸 것이 바로 <황금반도>이다.

책은 두 세기의 간극을 뛰어넘어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한다. 지리학적 식견이 녹아있는 동시에, 자연과 사람, 제도에 대한 묘사들도 놀랍도록 정교하다. 그는 밀림의 나무와 풀과 새와 곤충을 가는 지역마다 놓치는 법 없이 하나하나 호명한다. 그러면서도 “이 새로운 경이의 세계는 (…) 나를 절망하게 한다. (…) 내가 본 것을 독자들도 볼 수 있게 할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한탄하지만, 과한 겸양으로 비친다.

말레이 반도에서 자라는 박쥐란.
말레이 반도에서 자라는 박쥐란.
글에서 서구 중심의 시각을 짚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야만인(Savage, 책에서는 ‘비문명인’으로 번역) 같은 비하적 단어도 종종 등장하며, 역사적 사실에 오류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는 우월한 관찰자로서 현지인의 삶을 서술할 뿐, 대등한 존재로서 소통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속 깊은 교류 대상은 결국 영국 식민관료에 한정된다.

이런 약점과 한계에도 책의 가치를 낮춰볼 수는 없다. 가능한 한 균형잡힌 눈길을 보내려는 노력 때문이다. 그는 “말레이인더러 미개인이라고 하는 건 그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말레이인은 (…) 그들만의 복잡한 문명과 예절과 법률을 갖고 있다”고 서구 중심의 이분법을 경계한다. 상류층과 하층민의 주거지에 고루 관심을 기울이며, 말레이 왕국의 경제를 지배하는 중국인에 대해 “들여다볼수록 (…) 더 많은 감명을 받게 된다. 중국인의 열정과 근면이 없었다면”이라고 토로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끝쪽을 넘겨야 할 시점, 독자의 마음은 버드의 마지막 진술에 공명할 것 같다. “저 멀리 말레이 반도의 산들이 (…) 안개처럼 누워 있다. 나는 열대의 꿈에서 깨어나고 있고, ‘황금 반도’는 추억이 된다.”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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