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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무위 또는 불능의 소설

등록 2017-03-16 19:27수정 2017-03-16 19:43

오리무중에 이르다
정영문 지음/문학동네·1만3500원

상복이 없던 정영문(사진)에게 2012년 문학상 셋을 한꺼번에 안긴 소설이 <어떤 작위의 세계>였는데, 정영문의 소설은 말하자면 작위와 목적에 대한 거부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삼는다. 생산이 아닌 순수한 소모로서의 소설, 노자적 무위의 소설이 바로 정영문의 소설이고 그 점은 새로 나온 소설집 <오리무중에 이르다>에서도 여전하다. 아니 더 심해졌다.

“나 자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갈수록 소설을 쓰는 게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졌는데 이제는 거의 소설이 써질 수 없게 구상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플롯이나 서사나 배경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인물조차 등장하지 않는, 등장한다 해도 인물이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소설만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개의 귀’)

소설집에는 중편 셋과 단편 하나가 실렸는데, 그 넷은 넷이 아닌 하나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동일한 특성과 어조를 지닌다. “언젠가 이후로 삼인칭 소설을 쓰는 것이 어렵게” 되었고 “내가 쓰는 소설이 거의 일기처럼 바뀌고 있”노라고 ‘어떤 불능 상태’의 주인공은 고백하거니와, 그 말대로 수록작들은 모두 소설가인 일인칭 ‘나’가 등장해 소설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행위와 사건을 묘사하는 식이다.

정영문의 소설에서 줄거리나 주제는 중요하지 않다. 술을 마시는 일을 포함해 최소한의 행위와 사건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없어도 좋을 것들이고, 외적인 행위와 사건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주인공의 머릿속을 대중없이 오가는 어지러운 생각들이다.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대신, “할말이 어찌나 없는지, 그것에 대해서라면 아주 길게 얘기를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개의 귀’)이라거나 “어디에도 없는 곳에 가면 어디에도 없는 사람 정도는 될 수도 있겠지만 어디에도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으니 어디에도 없는 곳을 갈 수는 없을 것이었다”(‘오리무중에 이르다’)처럼 기묘한 유머를 만나는 재미가 쑬쑬하다.

정영문 소설을 가리켜 무위의 소설이라 했지만, 작가 자신은 무위보다는 ‘불능’이라는 표현을 선호할 듯하다.

“어떤 불능 상태에 이르러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는 것이 사실상 할 수 있는 것의 전부가 되었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은, 완전한 불능 상태에 이르는 것인지도 몰랐다.”(‘어떤 불능 상태’)

최재봉 기자,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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