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기, 괴물
임철우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임철우의 소설집 <연대기, 괴물>을 읽는 일은 고통스럽다. 바깥 세상 봄꽃들은 하루가 다르게 리즈 시절을 갱신하건만, 책 속 세계는 온통 죽임과 죽음, 한과 슬픔뿐인 탓이다. 이렇듯 어둡고 쓸쓸한 이야기들이라니! 작가를 이토록 아득한 절망에 빠뜨린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던 2000년 심장에 문제가 생겨 처음 쓰러졌고, 5년 전에 다시 쓰러졌어요. 다행히 큰 후유증은 없었지만, 그 뒤로는 술담배도 끊고 꾸준히 약을 먹고 있지요. 최근에는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자주 겪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15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작가는 “쓸 때는 몰랐는데 책으로 묶고 보니 죽어 가거나 죽음을 앞둔 노인들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서 스스로도 놀랐다”고 말했다.
소설집 <연대기, 괴물>을 낸 작가 임철우. “뉴스를 보면 화가 나고 그러면 심장에 좋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 텔레비전을 없앤 지 1년이 넘었다”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지만 이 절호의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여전히 조마조마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연대기, 괴물>에는 표제작을 비롯해 일곱 중단편이 묶였다. 장성한 아들과 아내를 차례로 잃고 그 자신 죽음을 준비하는 노인(‘흔적’), 쪽방촌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죽음을 맞는 남자 노인(‘세상의 모든 저녁’), 첫 부인을 사고로 잃고 재혼한 두번째 아내 역시 췌장암 진단을 받고 짧은 이별 여행을 떠난 중년 남자(‘간이역’), 남녘 섬 집필실의 원래 주인이었던 ‘아짐’에 얽힌 추억(‘이야기 집’), 이른 나이에 스스로 삶을 접은 여자 후배의 흔적을 좇아가 만난 늙은 뗏사공의 회고담(‘물 위의 생’) 등. 표제작만은 전쟁 무렵의 야만적인 죽임에서부터 베트남전쟁의 상흔, 5·18 광주, 그리고 세월호 참사까지 작가 특유의 역사적 증언 의지를 한 사내의 굴곡진 생애에 얹어 표출한다.
“피 묻은 쇠갈고리를 쥔 사내. 바다 위를 떠다니는 수많은 시체들. 수면 위에 해파리처럼 풀어져 너울거리는 여자들의 치렁한 머리채…”
‘연대기, 괴물’에서 어린 주인공이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끔찍한 이미지는 그의 평생을 지배한다. ‘괴물’이라 지칭되는 악은 그의 삶의 과정을 통해 여러 모습으로 변형되어 나타나지만, 자신의 생부이기도 한 쇠갈고리 사내야말로 그 구체적·근본적 실체라 할 수 있다. “온몸으로 피냄새를 풍기는, 세상 모든 악의 형상”이 다름 아니라 “그의 아비였고, 또한 바로 그 자신이었다”는 소설 말미의 깨달음은 현실이라는 악에 대한 책임이 다른 누군가에게 있지 않다는 아픈 자각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소설을 쓰게 된 건 5·18 때문이었어요. 분노와 슬픔, 증언에의 욕구가 내 소설을 끌어 왔지요. 그런데 그렇게 30년 이상 소설을 써 왔음에도 세계의 폭력과 불의는 그대로인 것 같아요.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고 건강 문제도 있고 해서 소설을 더 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작가로서 저는 나름대로 절실하게 최선을 다해 써 왔기 때문에 큰 여한은 없습니다.”
‘연대기, 괴물’의 주인공이 달리는 전동차에 뛰어든 것은 역사적 분노와 슬픔에 온몸을 던진 행위라 하겠지만, 나머지 작품들에서 죽음은 존재론적 성격이 승하다. ‘흔적’의 주인공은 꿈속에서 들린 울음소리를 “목숨을 가진 지상의 모든 것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소리”라 이해하는데, 소설집 <연대기, 괴물> 전편에는 그 울음소리가 흥건하다. 누구나 죽어야 하고, 죽는 순간에는 혼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단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분노만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지은 업과 남은 한이 그 울음을 끌어낸다. “운명적으로 망각에 서툰”(‘물 위의 생’) 작가는 죽어 가며 울음 우는 이들의 아픈 이야기를 곡진히 챙긴다. 작가에게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는 연습”이었다는 소설이 읽는 이에게도 저릿한 독후감을 남긴다.
지난해 8월 대학에서 명예퇴직한 뒤 지금은 요양차 제주에서 지낸다는 작가는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사람 관계에서 잘못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