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군자의 하나로서 곧게 뻗어 선비의 기개를 보여주는 대나무에서 유교사회의 선비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그림은 바람에 흔들려 휘는듯 버티는 대나무의 모습을 그린 조선 중기 화가 이정의 작품 ‘풍죽도’.
소학은 관계맺기 위한 몸만들기 프로그램
대학은 도덕적 매력 키우는 힘만들기 프로그램
장삼이사 위한 ‘교양서적’ 아니라
신념위에 투신하는 지도자 양성 가이드북
고전 다시읽기/‘소학’ ‘대학’
최근 대통령경호실을 소개한 글이 눈길을 끌었다. 군인과 경찰이 익히는 특공무술이 상대를 제압하고 자신을 살리는 데 목적이 있다면, “경호무술은 대통령 대신 자신이 죽는 훈련”이라는 것. 그런데 경호원의 원조는 장기판 속에 지금도 살아 있다. “장군 받아라”며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순간, 임금 대신 죽는 왕궁 속의 말이 그것이다. 이들은 임금을 옹위하고서 적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낸다.
그 말의 이름이 사(士)임에 주목하자. ‘士’는 본시 작은 도끼를 형상한 글자인데(맨 아래 가로선이 도끼날이고, 위의 긴 가로선은 자루다) 우리는 이를 ‘선비’라 읽고, 일본에선 ‘사무라이’라고 읽는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가 사무라이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자가 선비다. 전시엔 의병을 지휘한 ‘홍의장군’이다가 평시에는 정책을 제안하고 시를 짓는 ‘망우당’이던 곽재우가 문무를 겸전한 ‘사’의 전형이다.
그런데 대통령 경호원이 아무나 될 수 없듯, ‘사’ 역시 바란다고 누구나 될 수 없는 존재다. 사무라이든 선비든 둘 다 어떤 신념과 그것을 실현해내는 실천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이를테면 정의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최악의 순간에 몸을 날릴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자기 신념에 대한 사랑이 요구되는 존재가 ‘사’다.
하면, 이런 사람을 어떻게 배양할 것인가? 즉 ‘유교국가’를 이끌고 또 위기에 처한 군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를 길러내려면 어떤 프로그램이 있어야 할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이런 필요에 부응한 것이 <소학>과 <대학>이다. 요컨대 <소학>· <대학>은 리더십 가이드북이다. 조선시대는 이 특수 훈련과정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 이끄는 나라를 꿈꾸었다. 귀에 익은 ‘선비정신’이란 곧 부귀와 같은 개인적 욕망을 이겨내고 공공을 위해 몸 바치는 이들의 결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소학’이라고 하면 문득 초등학생용 도덕교과서가 떠오르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소학>에는 11세기 유교사상가, 주희가 꿈꾼 문명세계의 비전과 사회질서, 그리고 이를 이끌어내는 리더십 양성 프로그램이 들어 있다. 조선중기 젊은 이상주의자 조광조가 가장 중시한 텍스트가 <소학>이어서, 그를 두고 ‘소학동자’라고 조롱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자신을 죽이는 선비(土)정신 <소학>은 ‘소쇄응대’, 즉 집안을 씻고 청소하고, 인사하고 또 대답하는 기술을 몸에 익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소학>의 주제는 몸을 훈련하는 일이다. 여기 ‘몸 훈련’이란 곧 관계 맺기 훈련을 이른다. <소학>에서 사람다움은 타인과 제대로 관계 맺을 적에야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식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적에 ‘아들인 나’가 드러나며, 믿음직한 친구 역할을 제대로 행할 적에 ‘벗으로서의 나’가 표출된다. 그러니 <소학>은 인간관계(倫)를 밝히는(明) 길 찾기, 또는 각각의 네트워킹에 적합한 코드를 찾아 익히기라는 테마를 풀어헤친 책이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아내의 남편이며, 아우의 형’이지, 돌올하게 홀로 존재하는 ‘개인’은 나가 아니다.(로빈슨 크루소는 ‘소학’의 맥락에선 옳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소학>은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한 매우 구체적인 훈련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책을 펼치면 우스꽝스럽거나, 혹은 짜증이 울컥 솟는 대목도 있다. “일곱 살이 되면 남녀를 한 자리에 앉혀선 안 된다”라든지, “부모나 시부모가 부르시면 입에 밥이 들었더라도 내뱉고 바로 대답해야 한다. 곁에서 모실 땐 감히 구역질하거나 트림하거나 재채기하거나 기침하거나 기지개를 켜선 안 된다. 눈은 흘겨보아선 안 되고 침을 뱉거나 코를 풀어서도 안 된다”는 식으로 세세하게 나열되는 금지항목들이 그렇다. 다만 <소학>은 사적 욕망을 누르고 공공을 위해 투신할 인물을 만들기 위한 훈련과정이지, 농사짓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양서적이 아니라는 점에도 유의하여야 한다. <소학>이 엘리트 양성을 위해 옛 글들을 솎아 편찬한 교재라면, <대학>은 <예기>라는 큰 책 속의 한 장을 떼어 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대학>은 팸플릿마냥 분량이 작다. 주희는 유교문명을 부흥할 비전이 ‘대학’ 속에 있다고 감동한 나머지, 사서(논어·맹자· 대학· 중용)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고 그 속에 자기 비전을 흠뻑 담아 재구성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기왕의 주석을 고칠 만큼 애착을 보였는데, 그만큼 <대학>은 또 시비곡절이 많은 책이기도 하다.(이 책에 대한 해석 차이가 주자학과 양명학을 가르고 있다) 폭력 넘어선 세계관 탈근대적 <소학>이 ‘몸 만들기’ 과정이라면, <대학>은 ‘힘 만들기’ 프로그램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잘 알려진 <대학>의 전개과정인데, 이를 이뤄내는 힘을 폭력이나 권력이 아닌 ‘매력’에서 구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지나가면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람들 눈을 끄는 미인의 힘이 ‘미적’ 매력이라면, 실력 있는 선생님에게 고개 숙이는 것은 그의 ‘지적’ 매력 때문이다. <대학>은 ‘도덕적’ 매력의 정체를 알려 주고, 또 그것을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도덕적 매력’은 스스로는 낮추고, 상대방은 배려하는 ‘몸짓’에서 발생한다. 어렵고 힘든 일은 자기 몫으로 안고, 성공의 대가는 주변사람에게 돌릴 적에 생겨나는 것이 도덕적 매력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덕(德)이다. 덕을 수련하고(수신), 그 자아낸 힘으로 집안을 감동시키며(제가), 나아가 나라사람에게 미치고(치국), 급기야 온 천하와 산천초목조차 기꺼워하게 만들자(평천하)는 것이 <대학>의 비전이다. <대학>이 주의하기를 바라는 점은, ‘내가 세상을 구제하겠노라’고 스스로 손을 들고 나서서는 결코 평화가 이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 뜻을 앞세우고 또 남에게 강요하는 식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 도리어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도덕적 매력 속으로 주변이 빨려들 적에야 참된 평화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니 천하를 평화롭게 하겠노라며 제 손 들고 유엔 사무총장이 되려고 해선 될 일이 아니고, 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해 청와대로 가겠노라고 나서는 사람치고 제대로 일을 해내는 경우도 없다. 실은 내가 사는 이 동네, 이 직장에서 덕을 베푸는 자리에서 평천하의 씨앗은 돋아난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너무나 비정치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그렇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전근대적이다. 마키아벨리식 권력과 폭력의 시장을 상정하지 못하고, 도덕적 세계를 상정하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흑백갈등의 역사로 치면 지금쯤 피비린내가 진동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만델라의 힘(매력)으로 평화를 이뤄내지 않던가. 또 캘커타의 뒷골목에서 빚은 테레사 수녀의 사랑은 세상을 감동시키지 않았던가. 아니 이젠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조차 폭력(하드파워)을 넘어 매력(소프트파워)에 주목하자고 주장하지 않은가.(조지프 나이, <소프트파워>, 2004) 안중근·유관순 왜 ‘사’로 기릴까 이런 점에서 <대학>은 또 탈-근대적이다. 폭력을 넘어 매력을 발견하고, 이를 형성할 구체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권력과 폭력을 주제로 한 서구근대의 세계관을 ‘산 만들기’에 비할 수 있다면, <대학>은 ‘계곡 만들기’ 또는 자기 속에 웅덩이 파내기에 비할 수 있으리라.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 이황과 이이의 호가 ‘퇴계’요 ‘율곡’이란 점은 바로 <대학>이 품은 ‘계·곡’의 이미지를 잘 표현한다. 한데 산을 만들어 남을 압도하려는 생각 뒤에는 갈등과 전쟁이 남지만, 나 속에 웅덩이를 파내어 남이 끌려들도록 만드는 꿈은 화목과 평화를 빚어낸다.
요컨대 <소학>과 <대학>은 주변과 능숙하게 접속하는 자립적이고 소통할 줄 아는 인간을 지향한다. 이를 바탕으로 당대의 올바른 가치(시대정신)를 파악하게 하고, 신념을 위해 투신할 줄 아는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가이드북이다. 이제 우리는 왜 안중근을 ‘의사’로 또 유관순은 ‘열사’로 기리는지, 그들의 호칭 끝에 붙은 ‘사’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옷깃을 여미며 한 번쯤 따져 헤아려 볼 일이다.
서평자 추천 도서
소학
윤호창 옮김
홍익출판사 펴냄(2005)
(원문에 대한 성실한 번역과 소개)
대학: 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
김기현 지음
사계절 펴냄(2002)
(자구해설이 아닌 전체 얼개를 분석하고 오늘의 맥락으로 재해석한 <대학> 입문서)
대학
박완식 엮음
여강출판사 펴냄(2005)
(주희, 왕양명, 정약용 등 <대학>에 대한 대표적 주석들을 비교할 수 있도록 편찬한 책)
50자 서평
◇ 이미숙(39·홍익출판사 편집주간) “유학의 기초 교과서, 아이들에게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의 길을 가르치는 수양서. 물신주의와 이기적인 욕망으로 얼룩진 삶을 반성하게 하는 책.”(<소학>을 읽고)
◇ 뚱딴지(알라딘 마이리뷰에서) “온고지신이라고 했던가.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던 유교 경전들들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통해 유학 사상이 현재에도 유용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대학- 진보의 동아시아적 의미>를 읽고)
◇ 잠일성 지음 <대학 철학>에서 “<대학>은 사서 중에서 논쟁의 소지가 가장 많은 경전으로 작자에 대한 고증 등 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내용에 관한 해석 역시 많은 논쟁이 되고 있다.”(서광사 펴냄, 황갑연 옮김)
▽ 다음주 이후 고전 <걸리버 여행기>, <도덕의 계보학>, <존재의 심리학>(매슬로)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cheolwoo@hani.co.kr
자신을 죽이는 선비(土)정신 <소학>은 ‘소쇄응대’, 즉 집안을 씻고 청소하고, 인사하고 또 대답하는 기술을 몸에 익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소학>의 주제는 몸을 훈련하는 일이다. 여기 ‘몸 훈련’이란 곧 관계 맺기 훈련을 이른다. <소학>에서 사람다움은 타인과 제대로 관계 맺을 적에야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자식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적에 ‘아들인 나’가 드러나며, 믿음직한 친구 역할을 제대로 행할 적에 ‘벗으로서의 나’가 표출된다. 그러니 <소학>은 인간관계(倫)를 밝히는(明) 길 찾기, 또는 각각의 네트워킹에 적합한 코드를 찾아 익히기라는 테마를 풀어헤친 책이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요, 아내의 남편이며, 아우의 형’이지, 돌올하게 홀로 존재하는 ‘개인’은 나가 아니다.(로빈슨 크루소는 ‘소학’의 맥락에선 옳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소학>은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한 매우 구체적인 훈련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오늘날 이 책을 펼치면 우스꽝스럽거나, 혹은 짜증이 울컥 솟는 대목도 있다. “일곱 살이 되면 남녀를 한 자리에 앉혀선 안 된다”라든지, “부모나 시부모가 부르시면 입에 밥이 들었더라도 내뱉고 바로 대답해야 한다. 곁에서 모실 땐 감히 구역질하거나 트림하거나 재채기하거나 기침하거나 기지개를 켜선 안 된다. 눈은 흘겨보아선 안 되고 침을 뱉거나 코를 풀어서도 안 된다”는 식으로 세세하게 나열되는 금지항목들이 그렇다. 다만 <소학>은 사적 욕망을 누르고 공공을 위해 투신할 인물을 만들기 위한 훈련과정이지, 농사짓고 장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양서적이 아니라는 점에도 유의하여야 한다. <소학>이 엘리트 양성을 위해 옛 글들을 솎아 편찬한 교재라면, <대학>은 <예기>라는 큰 책 속의 한 장을 떼어 책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대학>은 팸플릿마냥 분량이 작다. 주희는 유교문명을 부흥할 비전이 ‘대학’ 속에 있다고 감동한 나머지, 사서(논어·맹자· 대학· 중용)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고 그 속에 자기 비전을 흠뻑 담아 재구성하였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기왕의 주석을 고칠 만큼 애착을 보였는데, 그만큼 <대학>은 또 시비곡절이 많은 책이기도 하다.(이 책에 대한 해석 차이가 주자학과 양명학을 가르고 있다) 폭력 넘어선 세계관 탈근대적 <소학>이 ‘몸 만들기’ 과정이라면, <대학>은 ‘힘 만들기’ 프로그램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잘 알려진 <대학>의 전개과정인데, 이를 이뤄내는 힘을 폭력이나 권력이 아닌 ‘매력’에서 구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아름다운 여성이 지나가면 그쪽으로 눈길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람들 눈을 끄는 미인의 힘이 ‘미적’ 매력이라면, 실력 있는 선생님에게 고개 숙이는 것은 그의 ‘지적’ 매력 때문이다. <대학>은 ‘도덕적’ 매력의 정체를 알려 주고, 또 그것을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도덕적 매력’은 스스로는 낮추고, 상대방은 배려하는 ‘몸짓’에서 발생한다. 어렵고 힘든 일은 자기 몫으로 안고, 성공의 대가는 주변사람에게 돌릴 적에 생겨나는 것이 도덕적 매력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덕(德)이다. 덕을 수련하고(수신), 그 자아낸 힘으로 집안을 감동시키며(제가), 나아가 나라사람에게 미치고(치국), 급기야 온 천하와 산천초목조차 기꺼워하게 만들자(평천하)는 것이 <대학>의 비전이다. <대학>이 주의하기를 바라는 점은, ‘내가 세상을 구제하겠노라’고 스스로 손을 들고 나서서는 결코 평화가 이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내 뜻을 앞세우고 또 남에게 강요하는 식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 도리어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도덕적 매력 속으로 주변이 빨려들 적에야 참된 평화가 이뤄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니 천하를 평화롭게 하겠노라며 제 손 들고 유엔 사무총장이 되려고 해선 될 일이 아니고, 나라를 이롭게 하기 위해 청와대로 가겠노라고 나서는 사람치고 제대로 일을 해내는 경우도 없다. 실은 내가 사는 이 동네, 이 직장에서 덕을 베푸는 자리에서 평천하의 씨앗은 돋아난다! 어처구니가 없다고? 너무나 비정치적이고,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그렇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전근대적이다. 마키아벨리식 권력과 폭력의 시장을 상정하지 못하고, 도덕적 세계를 상정하고 있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흑백갈등의 역사로 치면 지금쯤 피비린내가 진동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만델라의 힘(매력)으로 평화를 이뤄내지 않던가. 또 캘커타의 뒷골목에서 빚은 테레사 수녀의 사랑은 세상을 감동시키지 않았던가. 아니 이젠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조차 폭력(하드파워)을 넘어 매력(소프트파워)에 주목하자고 주장하지 않은가.(조지프 나이, <소프트파워>, 2004) 안중근·유관순 왜 ‘사’로 기릴까 이런 점에서 <대학>은 또 탈-근대적이다. 폭력을 넘어 매력을 발견하고, 이를 형성할 구체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권력과 폭력을 주제로 한 서구근대의 세계관을 ‘산 만들기’에 비할 수 있다면, <대학>은 ‘계곡 만들기’ 또는 자기 속에 웅덩이 파내기에 비할 수 있으리라.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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