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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왕이며 광대인, 소설가의 이야기

등록 2017-03-30 20:23수정 2017-03-30 20:44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
오현종 지음/문학동네·1만2000원

오현종(사진)의 소설집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에는 표제작을 포함해 여덟 단편이 실렸다. 표제작의 남녀 주인공 기와 진은 어느날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이유도 모른 채 낯선 방에 갇혔다가 다음날 풀려난다. 손가락을 잘라 내놓으라는 위협에 시달리며 공포에 떨었던 일이 꿈인 듯 현실인 듯 모호하게 처리되었지만, 더 모호한 것은 소설 내용과 제목 사이의 관계다. 사실 이 제목에 더 어울리는 것은 연극배우를 주인공 삼은 ‘연금생활자와 그의 아들’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서 평소 광대만을 연기하던 주인공 ‘나’는 모처럼 왕자 햄릿 역할을 맡는데 이 연극에서는 광대가 주인공이고 햄릿은 부차적인 역할에 그친다.

연극배우 이야기라고 해서 책 제목과 정확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고 나면 이 제목은 오히려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작가야말로 작품 속에서 왕도 되었다가 광대도 되는 존재니까.

‘부산에서’와 ‘호적을 읽다’는 자전적 색채가 짙은 소설들. 왕이나 광대가 아닌, 미혼 여성 소설가가 일인칭 ‘나’로 나온다. ‘부산에서’의 주인공은 연구년으로 학교와 집을 비우는 황 선생을 대신해 두 학기 동안 부산 달맞이언덕에 있는 황 선생 아파트에 머무르면서 그가 하던 강의를 맡게 된다. 새로운 경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부산에 다니러 온 지인들을 만나는 일 말고 달리 특별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온 이들과 만났을 때, 방송 관련 협회 이사라는 중년 여성이 내뱉듯 던진 말 한마디는 비수처럼 가슴을 찌른다. “소설의 시대는 이제 갔어.”

그 말이 끼얹은 모욕감은 ‘호적을 읽다’에서, 은행에서 신용카드 발급을 거부당하거나 비자 대행업체 사장의 떨떠름한 반응을 접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그러나 호적에 이름과 생몰 날짜만으로 등재된 조상들 목록을 접하면서 주인공은 아마도 소설의 역할과 가치를 역설적으로 확인하는 듯하다. “만남과 헤어짐, 두려움과 외로움은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되지 않는다”는 말은 거꾸로 그런 것들을 기록해 남기는 소설에 대한 자부와 신뢰로 읽히지 않겠는가.

‘난장이의 죽음에, 나는 잘못이 없다’는 조세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의 패러디이자 오마주. 제 살던 집터를 뭉개고 들어선 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하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난쟁이’, 그리고 치매 예방 삼아 문학 교실에서 <난쏘공> 수업을 들으면서도 정작 그 소설과 자신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교사 출신 할머니의 이야기가 절묘하다.

최재봉 기자,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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